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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남철의 「열병(熱病)」감상 / 박성준

Beyond 정채원 2014. 12. 14. 15:50

박남철의 「열병(熱病)」감상 / 박성준

 

 

열병(熱病)

 

   박남철(1953~2014)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

리가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일뿐이다

 

이제 불의 열차는 지나갔다 너는

지나갔다 고요하다

 

두 줄의 레일이 지평선 끝에 맞붙어

있고

 

항공 봉투 하나

침묵의 침묵 위에 떨어져

반짝인다

 

안녕

잘 가세요

 

PAR AV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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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견뎌야 한다. 견디고 있다. 그러나 견딜 수 있는가. 견디는 것이 가능한가. 또 무엇을 견뎌야 하는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 같은 현실이 유독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접촉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한평생 자신의 사생활과 현실의 참혹을 들춰내면서, 생활도 잃고 현실도 잃어버린 채 꿈속에서 살다 간 시인이 있다.

   그는 해체주의자인 동시에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현대인이었다. 독자를 길들여야 한다고 무지한 독자에게 얼차려를 주기도 하고, ‘다른’ 주기도문을 외우며 지상의 가혹한 질서 위에 군림하고 있는 권력과 아버지, 신을 풍자하기도 했다. 첫사랑 여자를 구타하면서 확보해내려고 했던 자기 정체성이거나 부정의 정신으로 무장한 독서법과 비판, 독설들은 그의 흠인 동시에 그의 반짝이는 상처였다. 한평생 시를 앓고 세상을 앓고 간 자리에 수술자국 같은 레일이 깔리고, 이제 불의 열차가 지나간다. 나는 지난 시집들을 다시 들춘다. 가만히 열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실패와 미완성을 사랑했던 한 시인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있다.

 

  박성준(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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