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혹등고래` / 정채원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19년 10월 16일
혹등고래
정채원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 새끼를 낳으러 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섞여 긴 노래가 되고
예언처럼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 뻔하고 모호한 젖은 몸뚱이는
이따금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친다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그렇게 숨을 쉬면서
▶‘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존재, 불구의 존재, 결핍의 존재, 혹등고래의 혹등 같은 존재가 내 안에 있다. 그 혹등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애증의 대상이 되겠다. 보이진 않지만 그 존재를 부정할 순 없는, 내 안의 타자들을 잘 껴안고 살아가는 일. 시가 있어 그 들끓음을 다독이며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요즘이다. 가슴 답답한 날들, 뻔하고 뻔한 날들이 이어지지만, 이따금 흘낏 다른 세상을 엿보는 일.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꿈결처럼 확인하면서, 그렇게 숨을 쉰다. (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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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제2회 한유성문학상 수상 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