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4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8)/사랑의 방법 - 정채원의 '장미 축제'

Beyond 정채원 2019. 10. 29. 20:41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8) / 사랑의 방법 - 정채원의 ‘장미 축제’


장미 축제

정채원


변심한 연인을 찌른 당신의 칼날에
장미가 문득 피어났다
칼날을 적시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꽃잎이 닿는 순간
살도 뼈도 녹아내린다
무쇠덩이도 토막이 난다

쓰러뜨린 얼룩말을 뜯어먹는
사자의 붉은 입처럼
장미는 점점 더 싱싱해진다
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겠다는 듯

부드러운 혀로 도려낸 심장들이
담장에 매달려 너덜거리는 6월

갓 피어난 연인들은 뺨을 비비며
서로의 가시를 핥고

밤새 바람을 가르던 칼날 뒤로
변심한 장미가 빼곡하게 피어났다
어느새 칼날을 삼켜버린
핏빛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문학동네,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8) / 사랑의 방법 - 정채원의 ‘장미 축제’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언젠가 과천대공원에서 장미 축제가 열려 가보았는데 장미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 그날 알고는 깜짝 놀랐다. 색깔과 모양이 다 다르고 향기도 다 달랐지만 나뭇가지마다 가시는 예외가 없었다. 사람이 씨 없는 수박은 만들었지만 가시 없는 장미는 개량해내지 못한 것일까. 정채원 시인의 이 시는 “변심한 연인을 찌른 당신의 칼날에/ 장미가 문득 피어났다”라는 섬뜩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장미 축제라기보다는 할로윈데이에 장미 정원에 몸을 던진 사람에 관한 얘기 같다. “갓 피어난 연인들은 뺨을 비비며/ 서로의 가시를 핥고// 밤새 바람을 가르던 칼날 뒤로/ 변심한 장미가 빼곡하게 피어났다” 같은 구절에서도 눈을 뗄 수 없다. 머리끝이 주뼛 일어선다. 사랑, 그 영원한 모순이여! 장미의 꽃말은 색깔마다 다르다. 빨강은 열렬한 사랑이고 흰색은 순결함과 청순함이고 노랑은 우정과 영원한 사랑이다. 칼날을 적시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으니 시인은 장미의 꽃말을 ‘파경’이나 ‘복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려니.

몇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전주교도소의 무기수가 그랬었다. 그저 사랑이 죄였다고 했다. 시 창작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교도소를 오갈 때, 어느 교도관이 자신의 경험으로 얘기를 해주었다. 여기에 와 있는 이의 반은 돈 때문이고 반은 사랑 때문이라고.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사랑에 집착했거나.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Tag
#이승하
#시인
#문학
#정채원
#시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