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의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약수弱水에 갇히다
맑은 강물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벽 속에 갇혀 있습니다.
ㅡ제발 나를 꺼내 주세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탈바가지들 기웃갸웃,
ㅡ아무도 없네.
투명한 벽을 지나 사람들 등 돌려 가버립니다.
*약수: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 속의 강. 길이가 3천 리나 되며
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제5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시집『두 개의 인상』(현대시학 기획시인선 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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