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139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 신형철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평설 / 신형철 나는 너다 44 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비평·에세이 2023.10.17

강인한의「신들의 놀이터」/정채원

신들의 놀이터 강인한 태초에 말씀이 있어도 좋고 장엄한 노을 아래 배경음악을 까는 것도 좋겠지 삼면을 장벽으로 세우고 한쪽은 바다가 좋아 평화로운 바다 지중해 대낮의 길거리 아무 데도 도망칠 곳이 없는 거리에 아이들이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 날아오는 비행기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하마스의 로켓탄을 던져봐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화우라늄폭탄도 몇 개 백린탄은 반짝반짝 폭죽처럼 아름답지 밤의 커튼 아래로는 신성한 달빛을 좀 흘려줄까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 철근이 꽃대처럼 목을 뽑아 내다보는 거기 어린 사내아이의 연한 뱃가죽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물고 가는 개 포도알처럼 달콤한 소녀의 눈을 파먹는 쥐들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 이 풍성한 성찬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어 유서 깊은 원..

비평·에세이 2023.10.13

기형도의 「진눈깨비」 / 박소란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 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비평·에세이 2023.10.02

[자작시 해설] 1965 / 강인한

[자작시 해설] 1965 / 강인한 1965 강인한 Ⅰ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처럼 급히 왔다. Ⅱ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와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 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Ⅲ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비평·에세이 2023.09.19

미학/김언

미학 나는 혼자서는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 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문학과지성사 2013 ----------------------------------------------------------------------------------------------------------------------- 김언 시..

비평·에세이 2023.09.13

백은선의 「좋은 소식」/박소란

좋은 소식 백은선 붓꽃이 폈다 꽃잎을 죄다 뜯어놓았다 어디로 갔니 연락도 없이 별이 쏟아지는 밤 숲은 끝없이 길어진다 나는 눈 뒤의 눈 흔들리는 것은 전부 빛이라고 믿어 몇 번이나 없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머리끝까지 물에 들어가기 전에 두 발이 먼저 젖었다 ............................................................................................................................... 사라졌다. 언제 어디로 떠나 버렸는지 알 수 없다. 한마디 말도 없이, 연락도 없이 숨어 버린 사람. 그를 더듬느라 ‘나’는 온몸 온 마음이 불덩이가 되었다. 이토록 활활 타오르는 애증의 열기. “꽃잎을 죄다 뜯어놓았다”는 ..

비평·에세이 2023.09.01

기호 너머의 기호, '모비딕'/손택수

백경 손택수 의족을 끼고 산다는 게 얼마나 절제 어린 삶을 요구하는지 알지 체중이 불면 구멍 속에 낀 살이 넘쳐 진물이 나고 너무 헐거우면 자신의 몸이 허구렁이 되고 마는 거 알지 에이허브 그대가 찾는 백경이 나의 백지이기도 함을 수심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나의 종이도 품고 있음을 그 바다에 해도에 없는 섬이 있다네 바위를 안고 뛰어들었으나 동여맨 줄이 풀리는 바람에 살아났다는 한 시인은 죽기로 한 바다에 날마다 바위를 빠뜨렸다고 하네 한 십년이나 했겠지 아마 수면 위로 어느 날 바위가 솟은 거라 죽은 바위가 저승까지 다녀온 거 같더만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또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해초가 붙고 조개가 붙고 파도에 쓸려가지 마라 쓸려가지 마라 따닥따닥 따개비들이 붙은 바위섬 이제는 섬에서 조개를..

비평·에세이 2023.08.31

황유원의 「음소거된 사진」/김영삼(문학평론가)

음소거된 사진 황유원 이 사진은 음소거되었다 밖에서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다 두 명의 사제가 천개(天蓋) 아래 담요를 덮고 곤히 잠들어 있을 뿐 그 옆에 개 한 마리 몸을 말고 함께 잠들어 있을 뿐 발전기의 소음 들리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아 바람은 한 찰나에 멈춰 있어 더 이상 불지 않는다 굳어버린 깃발은 바람이 어떤 온도로 불어오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사원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맞은편 건물 옥상 리버뷰 레스토랑의 푸른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이 모든 것 그 이상을 말해준다 수면은 얼어붙은 듯 잠잠하고 그 위에 묶인 배들의 고요 나는 이 사진을 아직 찍지 않았다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

비평·에세이 2023.08.26

정채원의 「데드 포인트」/반칠환

데드 포인트* 정채원 안데스를 일주하는 사이클 경기 콜롬비아의 산길을 오르는 선수들 산기슭의 아열대를 지나면 저만치 산꼭대기 만년설이 보인다 해발 사천오백 미터 산간고원을 달린다 산소가 희박한 공기 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가슴은 곧 터질 듯 헐떡인다 자욱한 안개가 귀를 핥으며 자꾸만 속삭인다 포기하라! 이제 그만 포기하라! 나는 핏발 선 눈으로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잉카의 태양! *데드 포인트(dead point)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 왜 좋은 길 두..

비평·에세이 2023.08.26

오은의 「그것들」/이수명, 박소란

오은의 「그것들」 / 이수명, 박소란 그것들 오 은 ​ ​ 주머니는 감싸준다 실수할 때마다 주머니를 찾았다 ​ 아침에 나갈 때면 꼭 동전 몇 닢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카드만 쓰지 않아? 친구가 물었다 ​ 들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으로 말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일 때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 짤랑짤랑 소리가 얼마나 안심되는 줄 아니 머릿속에 서릿발이 서고 가슴속에 빗발이 칠 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동전들을 만지작거렸다 ​ 구리, 니켈, 아연, 알루미늄…… 원소가 빛발이 되어 주머니 속에서 반짝였다 ​ 나갈 때 주머니는 하고 싶은 말들로 두둑했지만 돌아올 때 주머니는 상처투성이일 적이 많았다 ​ 속엣말이 불거지지 않게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 매일 밤 상처를 입고 옷을 벗었다 매일 아침 상..

비평·에세이 202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