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139

임재정의 「너머」/ 성윤석

너머 임재정 여기에는 없어 눈을 감는다 눈을 가리면 다른 곳이 환해지는 인간을 풍선은 이미 아는지, 누르면 어디로든 부푼다 엄마가 폐부에서 부풀린 아이처럼 세상이 누르면 핑계처럼 집으로 불거진다 함께하는 이웃이면서 모르는 사람들, 마주칠까 봐 자주 눈을 감는다 아이가 품고 있는 시간이 풍선 속으로 건너가 쌓인다 조금씩 무거워지던 풍선이 덜컥, 무서워질 때부터 어른이란다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풍선은 불다 보면 눈을 감고 마는 이것은 엄마가 잃어버린 샛길 환영 허수아비 영혼 도깨비 귀신보다 더 무서워 눈을 감는다 내겐 풍선이 들려 있다 두려움도 없이 좀비처럼 풍선 안을 날뛰는, 터질 준비를 끝마친 미래 얼룩진 낮은 쉽게 세탁할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 비눗방울이 떠다니는 꿈에 눈꺼풀 속 한곳만 환해질까 봐..

비평·에세이 2023.07.24

전수오의 「행간의 유령」 / 이수명

행간의 유령 전수오​ ​ 무심코 낙서를 한다 종이 위에 물고기 몇 마리를 그린다 ​ 잠시 비눗방울 날리는 밖을 바라보다가 ​ 종이를 다시 보니 물고기가 없다 ​ 너는 산 것 너는 죽은 것 ​ 정해주기도 전에 ​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 어스름에 내 뒤에서 잠깐 희미하게 웃을 것이다 ​ 빈 종이 위에 얼룩진 빛이 욱신거린다 ​ ‒시집 『빛의 체인』 2023, 1 ....................................................................................................................................... 아주 익숙한 오후 시간이다. 이를테면 커피를 마시며, 전화 통화를 하며, 빛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비평·에세이 2023.07.21

장혜령의 「이방인」 /양경언

장혜령의 「이방인」 감상 / 양경언 이방인 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볼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엔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길이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

비평·에세이 2023.07.04

서안나의 「분홍의 서사」 / 문태준

서안나의 「분홍의 서사」 감상 / 문태준 분홍의 서사 서안나 분홍 속엔 분홍이 없다 흰색이 멀리 뻗은 손과 빨강이 내민 손 나와 당신이 정원에서 늙은 정원사처럼 차츰 눈이 어두워지는 사라지는 우리는 분홍 ...................................................................................................................................... 흰색과 빨간색을 혼합하면 분홍색이 된다. 그러나 뒤섞어서 만들어낸 색채가 이 시가 말하려는, 의미심장한 궁극의 뜻은 아닐 테다. 그보다는 하나의 주체가 지닌 색채가 흐릿해지고 또는 변해간다는 것, 마치 넝쿨이 자라 뻗어가며 어딘가로 나아가듯이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을 ..

비평·에세이 2023.03.30

정채원의 「상처의 심도」/김윤정 (문학평론가)

[계간시평/김윤정] 다시 본질로, 삶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발췌) 상처의 심도 정채원 표피만 탔을까 더 깊은 속까지 타버린 건 아닐까 불탄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물관까지 탔다면 포기해야 한다 모든 상처를 눈물로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데 심도의 문제라지만 사랑의 심도 절망의 심도 그 보이지 않는 눈금을 무엇으로 잴 수 있나 산불이 남긴 그을음의 높이와 넓이가 각기 다른 숲속 물관을 따라 기어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물은 기억의 중력보다 힘이 세다 뿌리만 남았던 아카시아에도 새싹이 자라나고 거북등처럼 타버린 소나무에도 연두 바늘잎이 나오는 새봄이 왔다지만 아직도 계속 송진만 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나무들이 곁에 있어 쉽게 새봄이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지나간 불길을 지우는 속도는 제..

비평·에세이 2023.03.10

황유원의 시 「아르보 패르트 센터」를 읽고/정혜영(시인)

《포엠포엠》에서 본 詩 아르보 패르트 센터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비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

비평·에세이 2023.02.23

드레퓌스의 벤치에서(구상)/고두현의 아침 시편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빠삐용’ 실존 인물, 탈출한 뒤 ‘대박’ 드레퓌스의 벤치에서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 구 상 (1919~2004)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고니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

비평·에세이 2022.10.06

시론 & 시/정채원

나의 시, 나의 시론 / 정채원 변검쇼 1 정채원 오늘은 석민이지만 어제는 명호였지요 원래는 영섭이예요 지금 당신에게 영섭이가 말하는 거예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석민이는 늘 쥐색 정장 차림 바지 주름 칼날같이 세우고 다니는 사람 명호는 무릎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에 담뱃재 희끗희끗한 티셔츠 바람 회칼로 반대파의 목을 따고도 귀갓길 말기 암 어머니 전화 목소리에 귀가 젖는 사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에게 맘 놓고 속내 다 털어놓듯 비밀처럼 꽁꽁 숨긴 당신의 아픔 다 털어놓아도 돼요, 영섭에게 이제는 당신의 눈빛만 보아도 다 알아듣는 영섭에게 석민이도 아니고 명호도 아닌 영섭이가 지금 말하는 거예요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 아니, 결코 널 용서할 수 없어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입니..

비평·에세이 2022.05.25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상징학 연구소 2022년 봄호

오버 이윤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버 널 떠나기로 했다 오버 엔진이 툴툴거리는 비행기라도 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 열대 야자수잎이 스치고 바나나 투성일 거다 오버 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오버 죽이 끓고 변죽이 울고 이랬다 저랬다 좀 닥치고 싶다 오버 원숭이 손을 잡고 머리 위 날아가는 새를 벗 삼아 이구아나처럼 엉금엉금이라도 갈 거다 오버 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버 엔꼬다 오버 삶은 새로운 내용을 원하였으나 형식 밖에는 선회할 수 없었으니 떨어지는 나의 자세가 뱅글뱅글 홀씨 같았으면 좋겠다 오버 그때 네가 태양 같은 어금니가 반짝 눈부시도록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오버 지구는 속눈썹으로부터 흔들리는..

비평·에세이 2022.02.24

안수환의「딱 한 번」/윤효

딱 한 번 안수환 하나님은 평생 높은 곳에는 올라가신 적이 없다 딱 한 번 십자가 위에 ㅡ시집 《냉이꽃 집합》 문학저널 ---------------------------------------------------------------------- 한 사람의 생애를 한 줄로 요약했다. 상중하 세 권으로 나눠 묶어도 다 담을 수 없는 그 한 사람의 절절한 꿈과 슬픔과 기쁨의 고갱이를 이렇게 한 줄 문장으로 갈무리했다. 줄곧 불교적 세계관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나에게도 "하나님"의 전모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단연 시의 힘이다. 시의 광휘다. (윤효) 작은詩앗 《채송화》 26호

비평·에세이 202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