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기면/정우신 외

Beyond 정채원 2024. 9. 12. 13:24

기면

 

정우신

 

 

초겨울 저녁, 아무도 없는 이층집에 라디에이터가 돈다.

꿈의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여러 마리가 한 마리를 뜯어먹는 소리.

따뜻한 날개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소리를 낸다.

자기가 먹힌 것처럼.

밤새 벽을 두드렸다.

가슴 전체가 뜯겨 나간다.

나는 남은 물을 마저 돌린다.

 

 

 

 

바람 부는 저녁

 

이현승

 

 

산책로에서 갈대의 간격을 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들

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부대끼기 좋은,

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

 

 

 

낮달

 

안차애

 

 

귀신의 얼굴이 나를 다녀갔다

 

발자국도 발소리도 없이,

 

눈이 흐려져야 완성되는

비문碑文의 안색

 

내 얼굴을 빠져나간 네 오랜 표정이다

희미한, 낯익은, 멀어지는, 없는

 

저, 횡격막

 

 

 

시인

 

정채원

 

 

제 안에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며

손톱으로 긁은 벽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불긋한 핏자국 같기도 한 그것

 

 

 

《시인시대》2024 가을

다시 읽는 짧은시 깊은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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