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어디로 넘어지나 (외 2편)
김 영
오래전 넘어진 적이 있는
밤의 귀퉁이
핏방울 같은 불이 켜있다
몇 번쯤 그 핏방울 같은 불빛 속으로
찾아들곤 했었지만
넘어진 밤의 모서리는
내가 주저앉은 자리다
더듬거리던 것들 쏟아버린 사람, 혹은 쏟아버린 낭패를 주워 담는 사람이 밝은 대낮 어디쯤에서 넘어진 일들을 캄캄한 밤에 물어야 소용없다
어떤 낮이든 결국은 밤이 된다
또 어떤 밤도, 밤의 어떤 곳도 결국은 낮이 되고
낮엔 넘어지는 일이 너무 분명해서 부끄럽다
그렇다, 밤의 좌초도 낮의 좌표도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이상하다
밤에 넘어진 상처에선 붉은 피가 흐르고
낮에 넘어진 상처에선 거뭇한 멍이 배어나온다
낮엔 햇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지만 어둠은 너무 깜깜해서 어둠이 어느 쪽으로 넘어지는지 볼 수 없다 누군가 어둠은 슬프다, 한다면 내가 어느 쪽으로 무너졌는지 모르겠다 맞장구치며 딸깍,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불빛 같은 핏방울이 그때
어둠의 이마에서 배어나올 것이다
예민한 봉다리
비닐봉지가 쉴 새 없이 소란스럽다
거기 어떤 바람이 들어 계신 건가요
도무지 안쪽과 바깥이 모두 미끄러우니
어떤 마음이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들썩이는 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비껴가는,
미끄러지는 일인 것입니다
손잡이는 또 무엇입니까
몇백 년을 넘도록 썩지 않는 불사조이면서
고작 일회용으로나 쓰인답니까
조금만 담아도 불룩하니
제 속을 들킨답니까
바람보다도 예민하고
작은 불길만 닿아도 소스라치며 바짝
몸을 움츠리는 이 존재는
그러나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을 막론하고 유무형을 다 담을 수 있습니다
절대 흘리는 일 없이
질척한 것들을 옮길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예민한 봉다리 아닙니까
공기, 나사못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없다
허공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더 잘 버티기 위해
나무의 근원을 힘껏 조이고 있는 거다
바람은 공기가 걷는 발자국이고
공기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나사못 같은 것이어서
나무뿐만 아니라
폐호흡을 하는 존재들도
공기 나사못에 꽁꽁 박혀
일생을 옴짝달싹 못한다
공기 나사못이 만든 회오리에 휘말리는 것은
영혼의 태자리를 찾아 라싸로 가는 길의
고행 같은 것이어서
모든 사물이 저의 중심을 찾아가 닿는
순례 의식 같은 것이어서
회오리는 제 뿌리를 단단히 조이는
나무의 수행 같은 것이겠다
사물의 온갖 프로펠러에서 빠져나오거나 버려진
공기들도 다 돌기를 가진 나선형일 테니
고장 난 공기, 찌그러진 공기들은 또
거대한 자석 같은 태풍에 들러붙어
한 번씩 광폭해지는 것은 아닐까
바람개비를 들고 가만히 있으면
날개들이 돈다
바람이 나선형 돌기를 가진
공기인 것을 증명하듯.
시집 『예민한 봉다리』2025, 제21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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