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른
때마침 요른*이 집은 것은 염소가면이었다 다리에 달
라붙은 지느러미를 뽑아내느라 피가 흥건했는데, 가면까
지 덧칠하니 캔버스는 더 어둡고 기괴했다 요른은 은밀
하게 나이프를 놀렸다 폭염은 설탕처럼 녹아 끈적끈적했
다 빌어먹을, 이 폭염에 무슨 축제야 요른은 가면을 쓰
고 말린 염소고기를 씹으며 걸어 다녔다 광장과 중앙역
을 지나고 시립미술관으로 꺾어질 때 기어이 까마귀를
토해 냈다 염소가면은 더 깊고 더 무겁고 더 능숙하게
요른을 파먹었다 염소와 염소가 아닌 것들이 아교처럼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요른, 요른, 요른 ...... 서대문역에
서 요른은 더 이상 걷지 못했다 살구나무에 새파란 눈이
내렸다 요른은 검정에 붉은 물감을 섞으면서 축제의 끝
을 덧칠했다 뼈만 남은 물고기들이 그의 사지에 붙어 파
닥거렸다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 덴마크 출신의 화가.
박성현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시인수첩 시인선 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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