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가장 차가운 이미지/이병철

Beyond 정채원 2025. 11. 7. 23:49

   가장 차가운 이미지

 

 

   가장 차가운 이미지로는 눈에 파묻힌 초록 사이다병이 있다

 

   얼음과 탄산 사이에서 일곱 개의 별이 고요한

 

   뚜껑을 열면 폭발하는 시원한 감각

   열지 않아야 보존되는 서늘한 관념

 

   이누이트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위해 갈증을 참는다

 

   장면이 사랑보다 오래 남고 침묵은 많은 걸 해결해주지만

   목젓 따가운 울음 없이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데

 

   병따개는 금지된 사냥구다

   원주민들이 백인 개척자의 머릿가죽을 칼로 벗긴 걸 연상시킨다

더군

 

   열어야 할 것을 열지 못하는 사이

   금이 가고 물이 흐르고 우아한 슬로모션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차갑다는 단어에서 신기하게도 온기가 느껴진다

   산은 병풍이고 바다는 달력이겠지

 

   국자로 순록의 피를 떠먹는 아이들

   백야와 오로라와 피 냄새가 엉겨 붙은 극지는 무지개떡 같은 색

체의 레이어

   철분과 비타민을 섭취하려고 심장을 먹으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반복하면서 사라지고

   찰나는 그 희소성 때문에 무한으로 넓어지고

 

   사라지는 아름다움과 원치 않는 무한 사이에 사이다병이 있다

   병따개를 금지시킨 사람들에 의해 곱게 응결된 물방울들이

   속이 빈 행성처럼 굴절된 하늘을 머금는다

 

   눈물이구나 우리가 사는 별은

 

   이빨로 병뚜껑을 따자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한 모금을 마시자

   눈이 시리도록 트림을 하자

   트림이 긴 메아리로 돌아오면 병에 입술을 대고 휘파람을 불자

 

   은은한 병나발소리로 이미지를 지우자

   순록을 맛있게 먹고 사이다를 마시자

   북극곰을 살리자

   차가움을 삼켜서 차가움이 되자

 

   가장 차가운 이미지로는 순백의 종이가 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안은, 이제 모든 걸 그려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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