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499

YTN/이장욱

YTN 이장욱빗방울이 구름을그리워할까요?부러진 가지가 나무를?해변에 밀려온 파도가수평선을?내가당신을…… 안에서 닫힌 것들이 세상에는 많아서골목 저편에는 어둠이로커 안에는 의심스러운 가방이교회에는 하느님이그러므로 당신 마음에는누가 있는가? 나는 영영 비밀번호를 잊었는데어쩌면 처음부터 몰랐는지도 모르지.나무에게는 잃어버린 가지가 없고구름은 다른 하늘을 떠가고해변의 파도는 처음부터수평선의 일부 나는 나무에구름에십자가에열쇠를 넣고 돌려보았다.또는 0에서 9까지 무작위로 눌러서전 세계를 열어 보려고…… 그곳에는 구멍이 없고번호가 없고마침내내부가 없어서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고양이를 쓰다듬고조금 운 뒤에뉴스를 시청하였다.계간 《詩로여는세상》 2024 겨울호

전파사/권혁웅

전파사​권혁웅​​아직도 이 땅 곳곳에는 전파사가 있지전파사는 전파망원경의 자식들그 앞에서 오래 서성이곤 했다외계인의 메시지를 수신할까 싶어서아아, 들리는가 하나 둘 하나 둘막타워 앞에서, 까마득한 11미터 허공 앞에서조교는 마지막으로 물었다애인 있습니까?없습니까?오늘 처음 본 사람이 왜 그것을 묻습니까나는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올려다본 하늘에는 무수한 전선줄,나 없이도 그토록 많은 사연이 오가고 있었지십자로 가로지른 저 선은환승입니다이 마을버스는 약국 앞에서 내려요전파電波는 대체 어떤 물결일까요빛의 속도로 가닿는 소식을 막기 위해전파사에서는 자주 저항resister을 고치지제 손가락을 자를 수 없어서자기보다 더 그리움을 아는 말을 처단한김유신이라도 되는 듯허리 굽힌 풍선인간 앞에서공손히 맞절하는 아이처럼..

오래된 기억인지 오래전 꾼 꿈인지 알 수 없어요/고선경

오래된 기억인지 오래전 꾼 꿈인지 알 수 없어요 무슨 영화를 볼지 고르는 오후에아무것도 아닌 오후에 영화를 고르는 일은 좋지두툼한 이불에 파묻혀서 나는 계속해서 틀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또한 아무것도 아니니까 봄비하품봄잠버스 나는 자국을 남기는 것들이 좋더라그런데 취향도 낡아 갈까 빗물의 농도랄지 잠의 깊이랄지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에워싸고 울타리를 친다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누구라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과 모두가 망했으면 하는 마음이 같다는 게 실은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빌려 쓴 마음왜 안 갚아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아무렇지 않게영화도 보고 여행도 갔다 봄비하품봄잠버스 누비던나비의 날갯짓짓이기던 눈짓 나는 나를 밀려 써서늙거나 죽지 않..

언중유골 외/황유원

언중유골​ 황유원​​​말에도 뼈가 있다뼈까지 가보려면살을 모두 발라내야 하고살을 모두 발라내면 환하고단단하게 빛나고 있는말의 뼈가 드러난다말의 뼈는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고보통 말에는 뼈가 없어흐물흐물한 문어처럼좁은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어느새 눈앞에서사라져버릴 뿐인데어떤 말에는 뼈가 있어말의 척추가 곧게 서환한 기억들 모두 일으켜 세운다그러면 그날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뼈를 얻어 곧게 일어나역시 뼈가 있는 단단한 말로 내게웃으며 말을 건네주고그러면 나 역시 뼈가 있는 말로그들에게 단단하고 청명한울림이 되어주는 것이다말로는 천당도 짓는다는 말도실은 이런 의미일지 모른다 ​얼마나 좋은가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어준 천당의 지붕 아래서잠시 서로의 말이 드러낸 단단한등뼈를 쓰다듬으며우리가 헛것임을 잊을 수 ..

안부/김박은경

안부安否김박은경   함께 살 수 없게 된사람 없이 살 수 있을까 몹시 사랑하여 불행해졌지그 점은 마음에 들어 이곳은 공동의 묘지 같다이정표들은 묘석처럼 빛나고 자동차는 급발진하고토사는 쏟아져 내리고경솔한 과도는 날아오고골목 겹겹이 쓰러지는 사람들 나는 자꾸 눈이 감기네 죽은 쥐들이 뒹구는 계단을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같은 곳에 이르게 된다면 끝없이 되풀이할 수 있지만끝없는 절망일 뿐이라면 플롯에 대해서는 모르고 싶어시제는 지워버리고 싶어 몇 번이고 연락이 되지 않는당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내일 처음 만날 수 있다면 에테르로 가득한 대기 속에서기다리고 있습니다,알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무한을 완성할 거예요   반년간 《시인들》 2024 가을•겨울호

순수계단/강우근

순수계단 * 강우근   당신이 옷장 속의 옷을 고르고바깥을 향해 나가야 하는 일이 버거워질 때쓸리는 옷자락을 이끌고내려올 때 나는 당신이 오르내렸던 수많은 계단 가만히 멈춰 서서사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나는 15초 동안 두 손으로부터 해방된 장바구니7분 동안 풀썩 주저앉아 공상에 빠지는 얼굴3개월 동안 거미가 만든 거미줄그리고 지금 어디를 가야 하는지 잊은 채로오르내리던 당신의 발 나의 일은마음껏 두리번거리는 것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봐영혼이 발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는 것을 느껴봐 당신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문득온 마을을 달릴 때가 있지 당신은 경기장 양쪽 편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전공과목으로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태어난 순간 가진 외형이 커..

신발을 생각하다/황정산

신발을 생각하다 황정산   신발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안다, 그 갑작스런 공포를초등학교 교실에서 두 번, 술집에서 한 번상갓집에서 또 두 번 그리고 꿈속에서 무수히 많이신발을 잃고 난 요의(尿意)를 느끼고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어찌 돌아왔을까?그래도 난 여기 와 있다 신발은 매번 발에 맞지 않는다약간 작은 신발에 엄지발가락은 멍들고발뒤축은 까져 진물 흐른다헐거운 발목이 빨아들인 모래는수많은 이빨이 되고 형극이 되고발에 맞는 신발도 있었다 딱 한 번비싸게 주고 산 미제 트레킹화양복에 신고 나갔다 웃음거리가 된 후더는 신지 못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꿀 때내가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 궁금했다꿈속에서 때로 물속에 잠겨 허우적거리다신발을 벗어들거나입에 물기도 했다 신발이 없으면 내가 없다그래도 나의 신발..

멜랑콜리아/진은영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진은영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익사체/신용목

익사체    신용목      그는 물속을 들여다보듯 내 눈을 보았다 작은 불빛을 집어등처럼 비추며 물고기를 찾고 있었다    여기서 한 사람이 익사했다고 한다, 오래전의 일이라고……   물고기를 찾아    배를 가르면, 한 사람의 눈동자가 들어 있을 거라고 했다 틀림없을 거라고   삼켰을 거라고    헤엄치고 있을 거라고 했다, 한 사람이 보았던 모든 풍경이 물속처럼 펼쳐져 바다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여기서 한 사람이 익사했다고 한다, 어제의 일 같았다 내 살 속에서 첨벙이다 내 피를 다 마시고 가라앉은 사람   천천히 내 눈 위로 떠오르는 사람    오늘의 일 같았다 내 몸을 만지며, 여기서    여기서 한 사람이 빠져죽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수조에 물을 채우듯 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