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498

돌의자/박수현

돌의자박수현독일 슈튜트가르트 펠바하 포도원이랑 사이 유난히 키 높은 돌의자가 보였다푸른 이끼가 버짐처럼 번져있는 돌의자,옛날 일꾼들이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따낸포도송이 등짐 진 채 잠시 기대어 숨 고르던 곳이라 했다돌의자는 몇백 년 저렇게 껑충 서서초록에서 보라로 가는 포도밭의 서사를 고요히필사하였을 것이다송이마다 수백 개의 표정을 달고와르르, 초록의 질문들을 쏟아내는 어떤 보라에게는물끄러미 눈만 껌뻑거렸을 것이다쨍한 여름 뙤약볕이오크통마다 촘촘하게 쟁여지는 동안눈꺼풀 부비는 포도 송아리들밤마다 더 달콤한 통점들을 더듬거렸을 것이다포도밭에 내려앉던 까마귀 떼는휘도록 달린 어둠을 부리로 물고지붕이 붉은 고성(古城) 너머 날아갔다무르익은 보라에서 제비꽃향이 일렁이는 것은마른 잎사귀들 사이로 포도알 닮은 눈망울..

열린 문 열기/이화은

열린 문 열기 이화은   말끔한 회색 양복 중절모자가 문 앞에서push push push연달아 누른다 힘주어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홀 안의 사람들이 딱하다는 듯 모두 쳐다본다 push push push 손길이 더 빨라진다그러나 이미 열린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투명 탓이다거기 투명 문이 있다고 믿은 탓이다회색 양복 중절모자가 슬퍼 보인다 일 년에 800만 마리의 야생 새떼가투명 유리 빌딩에 부딪혀 죽는다고 한다거기 투명이 없다고 믿은 탓이다 투명은 어떤 기척이나 힌트도 없이 다만 투명할 뿐사람들은 투명을 의심하지 않는다투명을 투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회색 양복 중절모자가 보이지 않는다슬픔은 사람을 희석한다 슬픔에 슬픔이 덧칠해져 희미해지다가마침내 투명해졌을 것이다 열린 문이 더욱 슬퍼 보인다 회색..

제갈량이 죽은 나이를 지나며/서동욱

제갈량이 죽은 나이를 지나며 서동욱  저수지를 지나도 되는 걸까뒤엔 버려진 집들의 어두운 창문살림살이를 집어던지지 않으면결코 끝이 아니라는 듯요란했던 애인들 물은 보이지 않고갈대들이 꺾에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도와주세요버리고 온 진영들끝낼 수 없던 책들도와주세요아직도 바람 소리가 괴롭힌다 목각인형은 수레에 앉아 덜컹거린다산천초목은 우는데남쪽으로 가는 긴 행렬병사들은 투구 아래서서로 죽은 자의 눈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버리고 온 진영들불태워진 지도들이제 책은 없다도와주세요저수지를 건넜다  계간 《시와 편견》 2024년 여름호-----------------------서동욱 / 1995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곡면의 힘』 등.

북향 방/한강

북향 방 (외 1편)   한 강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겨울까지 익혀왔다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 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약간의 광선에도 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잿빛인 채 저물었는지 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조금씩 사전을 읽는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기억나지 않고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고통에 대한 명상)   새를 잠들게 하려고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검거나짙은 회색의 헝겊을(밤 대신 얇은 헝겊을)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부..

연못가/신승철

연못가 신승철                                                                                            있는 그대로가 완전하여, 한 사람의                                                                                            기쁨은 백천 사람들의 기쁨이 되네 청개구리 한 마리 폴짝, 폴짝 뛰니백천의 사람들이 따라 같이 뛰었네. 어여쁜 작은 청개구리짙푸른 풀숲으로 떠난 뒤 그 고요 속에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무엇 하나 잃을 게 없는 세상이지.          티끌조차 감출 것이 없는 세상이지.           한데 넌 애써 먼 길을 ..

눈물은 공평하다/강영은

눈물은 공평하다강영은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눈물 흘렸다. 땀으로 얼룩진 표정을 닦는 척,수건에 감정을 파묻고꾹꾹,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울음을 눌렀다. 양팔을 높이 쳐든 승자는메달을 가져갔지만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메달은 있었다. 시간이라는 메달!승부는 다만 순간 속에 녹여낸 사물일 뿐 딱딱한 기쁨을 목에 걸었다고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물컹한 슬픔을 손에 쥐었다고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안다.그 공평함이 세상을 걷게 한다는 것을 흐르지 않는 시간 있어눈물이 한 생을 완성하는 그때이슬처럼 영글게 하는 그 공평함이 신의 은총이라는 것을먼 길 걸어본 당신과 나는 안다. 월간 《新東亞》 2024.10-------------------------강영은 / 서귀포 출생. 동국..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이장욱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 이장욱  완전히 동일한두 개의 잎사귀를 찾아오세요.그러면 우리는 신이 되는 것인가?그렇대.그렇다. ​ 영원회귀는 영원하고오늘도 또 야근이구나.우리는 죽을 때까지 태양의 주위를 돌 뿐이니까당장 떠나요. 제주로.지중해로. ​ 거길 꼭 가야 해?우리에게는 해변으로 난 창문이 없는데창문은 사실 필요가 없는데우리 각자가 이미바다이기 때문에. ​ 엔트로피의 원리에 따르면당신의 사망 소식은 온 우주에 퍼져서 어느덧다른 소식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평평해질 것이다.그 위로 낙엽은 떨어지고떨어졌다는 사실조차사라지고 ​ 그걸 옛날에는 고엽이라고 불렀대.아, 이브 몽땅 말인가요?베트남전 말입니다만······마른 잎 죽은 잎이 정말 살아날까.겨울은 어디서 오는 걸까. ​ 영원히 회귀하는 인과의 ..

발굴 일지/백현

발굴 일지백현  1.돌도끼를 차고 사냥을 나간 너를 기다리며 나는 덤불을  들춰  열매를모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마주 보는 눈동자에서안타까이 발화하는 소리가 말이 되며 떨리는 목울대를 만져 보았을까 야습이 있던 밤 피투성이 몸뚱이로 돌무지에 던져진 내 눈에  들어오던월식의 밤하늘 달을 덮은 지구별의 그늘에서 먼 길을 돌아온 기억이 나를 깨운다 번개가 긋고 가는 한순간 다가오던 너의 눈빛  2.헤매어 다니던 석기시대의 벌판 어디쯤에서 나를 잃었을까 동굴속 모루돌 아래 고이던 침묵의 그늘을 지나 불타는 듯 뜨거운 너의 이마 위에 떨어지던 꽃잎을 지나 나는 어느 시간에 잡혀있는지 몇 겹 지층 속 돌칼과 나란히 뼛조각으로 묻혀있는 너의 타버린 꿈을 발굴한다 강을 건너 나뭇가지 사이를 달려오는 ..

나의 집/김조민

나의 집김조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뒤가 보이지 않았다바닥에 놓인 8월그림자 없는 정오는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까나는 아무 의자에나 앉았다눈이 바깥과 안을 구분하기 시작하면벽과 벽 사이의 삐걱이는 이음새에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가 곤란하게 걸려 있을 것이고오래된 가구가 내뿜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부염한 하늘이 흩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아무 의자에 앉았다간혹 시간을 줍기도 했다 그러다예고 없이 약동하는 고백처럼소나기에 붙들린 창가를 만나기도 했다나는 멀리로 돌아 가장 구석에서 시작했다남는 건 굶주린 밤이거나 들여다보는 얼굴이었다들어서거나 나간 흔적 없이 완벽한 어제와 같은 모습 그대로그때까지 가만히 유지되어야 할 것은 나의 집그외에는 필요하지 않은 이쪽이..

걸어오는 십자가 1/전순영

걸어오는 십자가 1 전순영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또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달빛도 별빛도 못 본 척 흘러만 갔다 돌이 요염한 모란꽃을 피우고돌이 찬란한 공작새 날개 드리우고돌이 햇볕을 삼켜버리고돌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돌이 하늘을 다 차지해 버렸다 납작 깔린 입술이 부르르 떨리던 밤이 더욱 먹물로 차올라 길은 화약고가 터지듯이 날아가고· · · · · ·  부러진 어깨들 하나씩 둘씩 보스락보스락 다 차지해 버린 하늘이 뇌성 벼락 내리치며 쏟아붓는 빗줄기흑탕물 속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가고개미 떼처럼 발버둥 치며 떠내려가고하늘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떠내려가고흙은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떠내려가고등에 붙은 위장을 움켜쥐고 떠내려가고 말을 삼켜버린 입술들이 보스락보스락 네 귀퉁이를 휘어잡고 휙 집어 던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