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499

걸어오는 십자가 1/전순영

걸어오는 십자가 1 전순영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또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달빛도 별빛도 못 본 척 흘러만 갔다 돌이 요염한 모란꽃을 피우고돌이 찬란한 공작새 날개 드리우고돌이 햇볕을 삼켜버리고돌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돌이 하늘을 다 차지해 버렸다 납작 깔린 입술이 부르르 떨리던 밤이 더욱 먹물로 차올라 길은 화약고가 터지듯이 날아가고· · · · · ·  부러진 어깨들 하나씩 둘씩 보스락보스락 다 차지해 버린 하늘이 뇌성 벼락 내리치며 쏟아붓는 빗줄기흑탕물 속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가고개미 떼처럼 발버둥 치며 떠내려가고하늘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떠내려가고흙은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떠내려가고등에 붙은 위장을 움켜쥐고 떠내려가고 말을 삼켜버린 입술들이 보스락보스락 네 귀퉁이를 휘어잡고 휙 집어 던져..

저녁의 경사/정혜영

저녁의 경사 정혜영  1. 경사면은 옳다모든 것이 깃들어 있다순서 없는 저녁의 문장이 다투어 피어나고울트라마린이 서쪽을 버티고 있다 2. 멀리 누군가를 부르는 희미한 밥냄새 3. 놀빛이 아름다운 것은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어서다환한 시간의 뼈다귀,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낯선 음악찬 바람을 흔들어서 빈 나뭇가지를 보여준다주홍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유혹의 입구 4. 창문 너머 키 큰 플라타너스의 어깨는 흔들리며 흐르는 시간의 강국경을 향해 어둠을 빗질하는 푸른 서쪽의 리듬어둠에 별을 매달고 이름을 불러준다 너나우리해뜨기전 이름 붙일 수 없는 최초의 놀빛을 찾아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그 테이블에내가 쓰지 않은 문장이 놓여 있다  《시와함께》 2024 가을호

내 아름다운 녹/장옥관

내 아름다운 녹 장옥관녹을 온몸에 받아들이는 종을 보았다암세포 서서히 번지는 제 몸 지켜보는 환자처럼녹은 아름다웠다움켜쥐면 바스락 흩어지는 버즘나무 가을은 저 홀로 깊이 물들었다나는 지금 녹물 든 사람링거 수액 스며드는 혈관 속 무수한 계절은 피어나고거품처럼 파꽃이 피고박새가 부리 비비는 산수유 가지에 노란 부스럼이 돋아나고두꺼운 커튼 드리운 병실 바깥의 고궁처마에 매달린 덩그렁 당그랑쉰 목소리파르라니 실핏줄 돋은 어스름 속으로누가 애 터지게 누군갈 부르나니, 그 종소리,   《문학청춘》 2022년 봄호    2023년 제5회 이용악문학상-------------------------장옥관 / 1987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너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

기면/정우신 외

기면 정우신  초겨울 저녁, 아무도 없는 이층집에 라디에이터가 돈다.꿈의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린다.여러 마리가 한 마리를 뜯어먹는 소리.따뜻한 날개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소리를 낸다.자기가 먹힌 것처럼.밤새 벽을 두드렸다.가슴 전체가 뜯겨 나간다.나는 남은 물을 마저 돌린다.    바람 부는 저녁 이현승  산책로에서 갈대의 간격을 본다.바람이 불 때마다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들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부대끼기 좋은,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   낮달 안차애  귀신의 얼굴이 나를 다녀갔다 발자국도 발소리도 없이, 눈이 흐려져야 완성되는비문碑文의 안색 내 얼굴을 빠져나간 네 오랜 표정이다희미한, 낯익은, 멀어지는, 없는 저, 횡격막   시인 정채원  제 안에끝 모를..

운명의 피아니스트/진은영

운명의 피아니스트    진은영     너는 나의 희고 검은 건반을 누르는 것 같다   잔설 쌓인 진창길에서 희미하고 기다란 고통이 들리는 것 같다.   봄의 나무통 속에서 초록 해머들이 나른한 심장을 터트린다   술잔 속의 얼음처럼 내 영혼은 어느새 사라진 것 같다   검은 깃털이 다 뽑힌 채 눈부신 알몸으로 매일, 매일 아침이왔다     《유심》 2024 여름

어둠은 어디로 넘어지나/김영

어둠은 어디로 넘어지나   김영     오래전 넘어진 적이 있는   밤의 귀퉁이에   한 방울 핏자국 같은 불이 켜 있다.    몇 번쯤은 그 핏자국 같은 불빛 속으로   찾아들곤 했었지만   넘어진 밤의 위치는   사람이 주저앉은 자리다.    더듬거리던 것들을 쏟아버린 사람, 혹은 온통 자신이 쏟은 낭패를 주워 담고 있는 사람이어서 밝은 한낮 어디쯤에서 넘어진일들은 캄캄한 밤에 물어야 소용 없다.    어떤 낮이든 결국은 밤이 된다.   또 어떤 밤도, 밤의 어떤 곳도 낮이 되고   낮엔 또다시 너무 분명해져 부끄럽다.   그러니 밤의 위치도 낮의 좌표도   모두 자신이 자처한 일이다.    이상한 것은, 밤에 넘어진 상처에선   붉은 피가 흐른다는 것이고   낮에 넘어진 상처에선   거뭇한 멍이 배..

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木백일홍 정채원  여름이 깊어야 비로소 피던 꽃다른 꽃 다 폈다 져도백일 동안 지지 않고 버티던 꽃잎들아무리 못 본 척해도 고집스레 붉던 꽃잎들연못 가득 떨어져 있다그래, 잘 가라외나무다리 건너나도 언젠가 너 따라가리니가서, 나도 백일 동안 ..

배낭/김언

배낭  김언   그 안에는 시집이 들어 있었다. 명료한 의식도 들어 있었다. 쓰러지는 사람도 들어 있었고 똑똑히 확인할 수 없는 사람도 들어 있었다. 육체와 다름없는 영혼이 들어 있었고 영혼과 다름없는 죽음이 들어 있었다.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의 장기가 파괴되고 있었고 두 개의 장기도 파괴되고 있었고 세 개의 장기부터는 나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쿡 찌르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 뭐가 들었습니까? 엄청나게 큰 일은 아닙니다. 소소하게 작은 일도 못 됩니다. 다만 나도 모르는 일이 들어 있고 당신은 그걸 꺼내서 소리 내어 읽는다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눈뜨고 있지만 바라볼 데가 없습니다. 겨우 일어선 갈비뼈들이 차례도 없이 무너지는데,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난파에 휩쓸리는 태양의 파산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1990. 10. 24.)                  “한 사회가 썩을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  ∴ 시인이 썩었다면 그 사회는 다 썩은 것이다.”   저의 등단 초기, 『문학정신』 사무실에 근무ᄒᆞ셨던 이추림 시인(1933-1997, 64세)께서 장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예의와 평생 두고 새겨야 할 덕목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는데요.   어제는 님의 친필 ᄉᆞ인이 든 시집 열두 권을 수북이 꺼내 놓고 망연히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들어 저 깊은 말씀이 자주 떠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