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352

마음의 왕자(다자이 오사무 산문집)/유숙자 옮김

책소개불안하고 고독한 청춘의 화신이자 전후 시대의 황폐한 정신 세계를 체현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필독해야 하는 46편의 산문을 한데 엮은 『마음의 왕자』가 민음사 쏜살 문고로 출간되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우리나라 독자에게 특히 친숙한 일본 작가로, 그의 대표작 『인간 실격』, 『사양』 등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그러나 다자이와 그의 작품을 둘러싼 독자의 비상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가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산문은 파편적으로 소개되어 왔을 뿐, 좀체 일목요연하게 엮인 적이 드물었다. 이번에 출간된 『마음의 왕자』는 작가의 문학 인생을 초기(1933)부터 최후(1948)까지 톺아볼 수 있도록 결정적 작품만을 연대별로 엄선하여 수록한 산문집으로, 작가의 애독..

책소식 2024.12.21

토마토 파르티잔/원도이 시집

그네  발이 닿지 않아서바닥이 사라져서 좋습니다흔들려서흔들리기 좋아서한시도 멈추지 않아서멈출 수가 없어서앞으로 뒤로 꼭 그만큼만 가고그만큼만 돌아와서물러나도 더 물러설 수 없어서물러난 곳이 하늘이어서공중에 매달려서날 수 있어서아주 잠시 나비가 되어서아이가 되고 놀이가 되고구름이 되어서그리고 지상에 닿았을 때잠시, 어지러워서 좋습니다   원도이 시집 《토마토 파르티잔》, 달을쏘다시선 021, 제9회 동주문학상 수상시집

책소식 2024.12.04

오늘밤은 리스본/김영찬 시집

나의 고독은,  나는 주전자처럼 고독하다, 독 짓는늙은이처럼 고독하다 나는 모기 눈알처럼 고독하다나는 난, 자동차 뒷바퀴처럼 고독하다 나는 왜 이렇게고독한가 나는 시를 쓸 때만 고독하다 나는 나시를 쓰고 나서도 고독하다 이 고독은 어디서 값비싸게 오는가 그걸 몰라서근본을 알 수가 없어서고독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고독하다 고독이 왜 값비싼 것인지 그런 걸 생각하지않기로 한 것이 고독하다시인은 나에게'나는 터널처럼 고독孤獨하다'고엄살을 피웠다 거짓말! 터널을 찾아내 터널 깊숙이 들어가 터널에게 물어보니터널은 고독과 친한 적이 없다고딱 잘라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터널은 달랐을까산티에고의 고독은 산티에고를 위해 유별난것이었겠지 나는 정말이지 주전자처럼 고독하다 주전자 속에끓고 있는돌멩이처럼 고독하다 '고'는 덩..

책소식 2024.12.03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이화영 시집

하나의 이름을 버릴 때   나비가 피는 계절이 있다 나비는 하냥 피어났고내일도 필 것이다나비가 피기까지 열세 마리 꽃이 날아들었다꽃 이름을 부르면 나비가 쑥대밭이 될까 봐눈으로 좇았다 나비가 정신없이 물들어 갈 때꽃은 어디쯤 향해 뜨거워지나 손 지문 닮은 협곡을 따라꽃이 빙빙나비가 빙빙 암록의 베일은몸 풀기 좋은 구유였다눈이 쏙 빠지는 해산이 끝나면세상은 변명으로 붉었다 나비저녁에 이름을 버리고아침에 혁명을 노래했다 동면에 드는 열세 마리 꽃들    검은 호리병에 담긴 모란   스며든 빛이검은 호리병의 선을 뭉그러트렸다사라진 선을 낱장으로 읽었다 오방을 떠돌다 온 바람이모란으로 담겼다 봄빛 한 폭 베어와그늘을 나누는 저들의 필법을나는 오랫동안 훔치며서성일 것 같다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2..

책소식 2024.11.21

자정의 이물감/이성렬 시 · 산문집

각설탕  이성렬  그 성채의 설계자는 바벨탑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여, 천국을 향해 층층이 쌓아올리는 공법 대신, 허공에 중심을 띄우고 사방으로 방을 무한히 복제해 나갔다. 모든 색상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성곽의 입구는 보이지 않으며, 순백으로 탈색된 자에게만 열린다. 회색 심장을 가진 고독한 소설가가 성채 주변을 맴돌다가 절망한 적이 있다. 스스로 성을 떠난 주민은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것은 다디단 벽 때문. 아름다운 여름날, 외벽에는 물방울이 맺히는데, 눈을 가린 꽃의 요정들이 발코니로 삼아 소야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디에도 거울이 없어, 만년에 비극적인 사상을 품은 화가는 조소하는 자화상을 순전히 상상으로 그렸다. 미로 깊숙한 곳, 안개의 방은 간혹 누군가의 통곡의 벽이 되는데, 그 내력을..

책소식 2024.11.02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시집 뒷표지전철 4호선,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십이 초나 십삼 초.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나는 고개를 든다.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어둡다.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가속도만..

책소식 2024.10.12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천양희 시집

시인  속에서 불꽃을 피우나 겉으론한 줌 연기를 날리는 굴뚝 같은 세찬 물살에도 굽히지 않고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  천양희 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시선 510

책소식 2024.10.10

산책로/차도하

산책로 차도하  네모를 가방에 넣고 걸을까 합니다동그라미가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용서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산책로가 필요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둘이서 얘기하며 걷는 사람뒤로 걷는 사람박수를 치며 걷는 사람의 소음이가방 안에서 네모가 내는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지워야 합니다 그 산책로는 세상보다 길어야 합니다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 걷다가걷다가                          걷다가 지쳐서다시 집으로 돌아가단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아직 걷지 못한 산책로가 있으니까 내일 다시 걸읍시다네모의 모서리가 약간 닳아 있습니다   시집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책소식 2024.10.09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장옥관 시집

일요일이다 장옥관  다시 일요일이다태양은 여느 태양과 다르지 않다 어제 그 자리 그 시간에 조금 옆쪽으로 비켜앉았다직접 보진 못하고 감은 눈으로만 보았다 어젯밤엔 초나흘 달을 보았다눈 아래 찢어진 흉터 같았다그제 밤에 본 것보다 좀더 벌어져 있었다 파밭의 파가 조금 더 솟고자두나무 가지가 조금 더 처진다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늙었다 그젠 삼십 년 입은 바지를 버렸다옷을 버리는 일은 슬프다버리고 버림받는 일은 유정(有情)한 일이다 다시 일요일이라서 슬프다하루하루를 버린다어제보다 우주가 조금 더 옮겨 앉았다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책소식 2024.09.20

술의 둠스데이/문정영 시집

술의 둠스데이 (외 2편)   문정영  매일 술을 조금씩 먹고 자랐다 서른 마흔 나이 먹으면서, 좁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달리기하면서 술병에 숨어 독작하였다 어떤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 않다, 술잔에 이야기하였다 폭음을 싫어한다는 말에 꽃잎이 혼자 웃었다 지구의 종말은 비둘기가 먼저 알 거야 뱉어놓은 술 찌꺼기를 가장 많이 먹는 짐승은 위대하니까 간에서 자라는 물혹들이 가끔 물었다 내가 자란 만큼 술은 사라졌는가, 아니 빙하가 녹는 속도를 묻는 게 더 빠를지 몰라 불안한 공기를 뱉으며 키가 줄었다 몸속에 들어와 숨쉬기 곤란한 질문이 이별이었을까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들이 따듯해졌다 좀 더 놓아버릴 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실언했다 더는 당신이라는 말을 술병에 담지 않겠다고자정 지나 혼잣말하곤 했다  탄소발자국..

책소식 2024.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