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352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오병량 시집

오병량(지은이)의 말 봄 앞에 앉아,나는 여태,나의 주어가 못 되는 처지입니다.당신의 마음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그립다,죽겠습니다.    꿈의 독서  방안을 살피는 일이잠자리를 들추는 일이 아니기를책을 살피는 일이 문장을 소독하는 일이아닌 것처럼 눈의 검은자가흰자위의 독백을 이해할 때꿈이 찾는 조용한 가치들 선명한 여름인데 우리찢긴 페이지처럼 갈피가 없어너는 말없이 울고 빗물에 젖은 새처럼 흐느끼고하마터면 내 눈에 쏟아질 것 같은 널 안고팔베개를 해주었지책을 보았는데, 꿈은커다란 구렁이를 목에 휘감고 자는 일이래그럼 무섭지 않아요?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런 거라면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주었지용기가 난 듯, 너는 넘어진 책장을 일으켜 세운지난밤 꿈 얘기를 했는데, 불길한 눈을 가진계집애를 보았다고 분명어려..

책소식 2025.02.06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안주철 시집

보르헤스의 시 동그랗게 말린 시를 건네면서 보르헤스는 낭독을 부탁했다 대답 대신 동그랗게 말린 시를 서서히 펴고 시를 바라보았다 라틴어로 쓴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수 없었지만 계속 들여다보아도 긴장이 되거나 관객이 두렵지 않았다 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글자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도 관객도 나도 사라졌지만 꽃이 계속해서 자랐다 비가 오겠다 내 가슴에서 출발한 눈물이 당신의 눈에서 쏟아지는데도 나는 모른다 어디까지가 눈물인지 당신의 이마와 당신의 주름과 당신의 쓸쓸한 나이를 나는 세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내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 한 마리 구석이 될 때 누군가 나를 손끝부터 머리끝까지 눈물로 오해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듯이 비가 오겠다 외롭다 그립다 쓸쓸하다 이런 말들 밖에..

책소식 2025.02.05

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에게/한영옥 시집

구원의 감각 한영옥  밤늦어 외진 벌판 시골 정거장에왜 홀로 으스스 떨고 있었나까닭이야 앞과 뒤로 수북하지만두려움 껴입고 서 있어야 했던구구한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그 자리에서 생생하게 겪어 낸초조와 불안 요동치던 맥박그리고 어느샌가 옆자리를 채워 준연인들의 따끈한 입김에 대한 기억공포감이 툭 터질 듯하던 때에언 몸을 다독여 주던 구원의 감각감각은 구원의 기미에 민감하다는 걸그 이후에 떠올려 보고 했었다오래 불안감에 시달리는 네게 전한다'불안은 불안이 불안해하는 거'라는푸른 페이지의 문장을    폐일(吠日)한영옥해를 보고 짖는 개를 보았네해를 처음 본 탓이라고 알고 있네제 알던 범위에서 벗어난낯선 눈부심이 두려운지점점 맹렬하게 짖어가네제 알던 범위에서 훌쩍 벗어난콸콸 끓어오르는 해를 보며짖는 도리밖..

책소식 2025.02.04

동주 시, 백 편/이숭원

상세 이미지저자 소개 (1명)저 : 이숭원 (李崇源)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1955년 서울 출생으로 문학 박사이자 문학 평론가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학교와 한림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1986년 평론가로 등단하여 한국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다. 저서 『서정시의 힘과 아름다움』, 『백석을 만나다』, 『영랑을 만나다』,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김기림』, 『노천명』, 『세속의 성전』, 『폐허 속의 축복』, 『감성의 파문』, 『폐허 속의 축복』,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 『시 속으로』,..

책소식 2025.01.29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나금숙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나금숙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나무 아래 사과들은 해거름에 찾아오는젖먹이 길짐승들의 것꿈에서 깨어도 사과나무는 여전히 사과베이비박스 속의 어린 맨발은분홍 발뒤꿈치를 덮어줘야 해쪼그맣게 접은 메모지에네 이름은 사과그러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지을 때까지 지어보려는파밀리아 성당처럼사과들은 공간을 만들고구석을 만들고지하방을 만들고삼대의 삼대 아비가 수결한 유언장 말미의 붓자국처럼희미한 아우라를 만들고,산고를 겪는 어미의 거친 숨결이사과나무 가지 사이로새로운 사과를 푸르게 푸르게 익혀가는 정오쯤우리는 비대면을 위해 뒤집어쓴 모포를 널찍이 펼쳐서하늘을 받는다 하늘의 심장을 받는다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뜨,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변용.    ..

책소식 2025.01.22

시월詩月/ 윤효 시집

한천寒天    윤효    채신머리도 잊고  노릇노릇 공들여  키운 열매를땅  위에다  잔뜩  차려놓았는데도 어느 한 놈 기웃거리지 않았다. 늙은 은행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수수 잎을 내려 그 낱낱의 슬픔을 덮어주는것뿐이었다.     쥐똥꽃    ―양천공원 1       이팝꽃 지자 쥐똥꽃 폈다.   매연과 소음 속에서도 순서를 기다려 쥐똥꽃 또은은히 폈다.   빛깔과 향기가 작년 것과 똑같았다.    눈물이 났다.      엄마   ―우즈벡詩抄7      엄마는 어디 갔을까?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   칸나.    우리 엄마는 어디 갔을까?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   칸나.       윤효시집 『시월詩月』, 서정시학 서정시 155

책소식 2025.01.19

여기, 오독이 내리고/차영미 시집

미로와 미궁사이  기다리는 척한다 나는 잠시숨을 고르고 심장 소리가 들리고화면이 열리는 소리낯선 명령어를 연습한다성급함을 자르고 오타 속으로가끔 그는 친절하고나는 자주 길을 잃는 손가락기억은 찾아오지 않지불안은 나의 무기였으나소리를 삭제하고 손톱을 자른다싫어하는 너를 위해 비껴가는 소문으로오래된 비문을 숨긴다소음이 합쳐지는 사이 단어를 걸러내고오류를 쏟아낸다 모니터는“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화해를 시도하고삭제를 반복하고어제의 심야에 도달한다진동을 닫는다 몸속에 숨은   차영미 시집 《여기, 오독이 내리고》, 시와세계 시인선 054

책소식 2025.01.12

살 것만 같던 마음/이영광 시집

어두운 마음   모르는 어떤 이들에게 끔찍한 일 생겼다는 말 들려올 때아는 누가 큰 병 들었다는 연락 받았을 때뭐 이런 날벼락이 다 있나, 무너지는 마음 밑에희미하게 피어나던어두운 마음다 무너지지는않던 마음내 부모 세상 뜰 때 슬픈 중에도내 여자 사라져 죽을 것 같던 때도먼바다 불빛처럼 심해어처럼 깜빡이던 것,지워지지 않던 마음지울 수 없던 마음더는 슬퍼지지 않고더는 죽을 것 같지 않아지던마음 밑에 어른거리던어두운 마음어둡고 기쁜 마음꽃밭에 떨어진 낙엽처럼,낙엽 위로 악착같이 기어나오던 풀꽃처럼젖어오던 마음살 것 같던 마음반짝이며 반짝이며 헤엄쳐 오던,살 것만 같던 마음같이 살기 싫던 마음같이 살게 되던 마음암 같은 마음항암 같은 마음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 (2024.5), 창비시선 502

책소식 2025.01.06

휴먼 히스토리아/이상옥 시집

빅뱅 혹은  무한한 밀도와 질량의한 점으로 뭉쳐백억 년 전의 대폭발신이 손가락으로튕겼을 법한우주는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지구와 태양조금만 멀거나 가까워도자전과 공전 각도속도 또한 달라도생물체는 심정지,신의 창조가 아닌물리법칙에 따라만들어졌다는스티븐 호킹의 말도유영하는비옥한 초승달 지역메소포타미아 남부수메르인들은문자를 사용하며점토로 벽돌을 만들어집을 짓고배수와 관개,대수로가 뻗은도시국가를 건설하면서도사제나 왕은에이전트였다,우주를 운행하는 그분의    이기적 유전자  아벨은 양을 치며떠도는 유목민영역 다툼도있을 법했다야훼는아벨의 제사는 받고가인의 제사는거부했다분히 여겨동생을 돌로 쳐 죽인인류 최초의 살인자,농사를 지으며철놋으로연장을 만들어정착촌을 건설했다늑대 젓을 먹고함께 자란쌍둥이 형인 로물루스도동생 레무스..

책소식 2024.12.27

개와 늑대와 도플갱어 숲/임원묵 시집

친한 사이    여기군요.  아직 열감이 남아 있어요. 누군가 방금 떠나간 자리입니다. 여기에 앉겠습니다.이 정도 온도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사랑을 빼고 만나야 오래간다고 했던가요? 기억나는대로 카페인을 뺀 커피를 주문합니다. 밤이니까요. 두근거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래 앉아있을게요.밑줄을 긋다가도 고개를 젓고 담배를 피우다가도 숨을 참으며, 빈자리가 생기고다시 채워지고 또다시 떠나는 동안 수도 없이 종을 치는 문틈으로 빛이 들어올까 봐, 미미한 열감에 담요를 덮으면 콧등에 크림 묻는 꿈을 꾸겠지만, 몸을 일으키다 우유를 엎지르진않겠습니다. 감기에 걸린 거라 해도, 이 정도 온도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사랑을 빼고 써야시가 된다고 했던가요? 기억나는 대로 썼습니다. 오래됐으니까요.   이 카페가 마음..

책소식 2024.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