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500

겨울의 내부/박재우

겨울의 내부 박재우 새는 생애에 딱 한번 몸을 바닥에 누인다고 한다 가는 가지를 움켜쥐느라 갈래진 두 발 나란히 눕히고 한눈으로 자기가 도약한 곳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눈이 땅을 후벼 들어간다고 한다 온몸에 일어선 물결이 그를 어디론가 떠밀고 간다 그 어디는 누운 새와 나뭇가지의 거리쯤이라고 한다 그 거리에는 나무의 그늘이 파본처럼 쌓여 있고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바람의 붉은 목젖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어스름 같은 빛에 들어 읽히지 못한 채 쌓여 있는 책을 들춰 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러다가 모든 문장이 목젖을 잃고 쓰러진 바람의 이야기 로 끝나기 전에 어둠 한 채 딱 들어맞는 문을 걸어두는 것이다 의미를 다 쓴 새는 이미 새가 아니듯 생의 미동을 잃고 누워있는 물결, 대지에 겨울이 왔다, ..

별들의 속삭임/황유원

별들의 속삭임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자들은 아마 야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너무 춥지 않았더라면 너무 추워서 하늘을 날던 새들이 나는 도중 얼어 땅에 쿵, 얼음덩어리로 떨어질 정도가 아니었더라면 별들은 속삭이지도 않았을 거다 별들의 속삭임은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 그것은 가청 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원음에 가깝게 재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아름다움이고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자는 시베리아 아닌 그 어디서라도 하늘의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 밖에서 누군가와 나눠 낀 이어..

모과/도종환

모과 결실이라는 말을 나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말 안에 들어 있는 무게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대해 감사해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몸의 터질 듯한 과육에 주목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나뭇잎들을 나는 더 애틋하게 바라본다 내 몸 안쪽에도 내상의 흔적이 많지만 태풍에 찢어졌던 나뭇잎은 상처가 더 깊어졌고 나 대신 벌레에게 살을 내준 나뭇잎은 몸 한 쪽이 허물어졌다 내게 물방울을 몰아주고 난 뒤 지쳐 바싹 마른 잎과 깊은 멍이 든 이파리들이 여기까지 함께 왔다 내일은 상강 그들 없이 나 온자 왔다면 나는 팔월의 날카로운 시간을 넘지 못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붙잡아 준 꼭지의 매일 매일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이..

서쪽/홍일표

서쪽 ​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

버터/박선민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

악몽/강인한

악몽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찔려 있다. 붉은 안개가 피 묻은 붕대처럼 천천히 풀리며 내려온다. 자정에 당신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당신의 그림자. 거울을 열고 밤하늘로 내딛는 첫 발자국에 스윽 피가 묻는다. 내일 아침 당신이 못 돌아오게 되면 당신의 그림자가 하류에서 발견될 것이다. 시집 《강변북로》 기획 단시 리뷰, 《시와세계》 2022 겨울호

우리는 날아가는 검은 우산을 기억해낸다/정지우

우리는 날아가는 검은 우산을 기억해낸다 정지우 어떡해, 죽음 이후는 죽음 이전을 생각하게 하는 걸까? 갑작스러워서 너무 안타까운 부고장 속으로 비가 내린다 머그잔을 만지면 빗물을 떨어뜨리는 너머에 골목이 골목을 돌며 벗어나지 못한다 질문 하나가 수문을 여는 하늘, 검은 이끼처럼 먹구름이 창문을 덮어온다 접힌 형태로 새가 날아간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둥지와 자녀들 시집 출간에 대해 얘기했지만 테이블과 바닥에 울음이 흘러넘치므로, 우리는 부족해진다 출판을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유고시집 생존하는 시들은 회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이 세 사람은, 세 사람으로는 충분치 않은, 한 사람을 흘려보낸다 수심은 헤아릴 수 없어 쌓이는 물방울 무덤이겠다 시의 영혼에게 육체를 입히는 구름 수의 흠뻑 비를 맞은 시들이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