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500

아나키스트의 뜰/김영찬

아나키스트의 뜰 내일과 모레는, 레일 없는 모래 위에 뜬금없이 펼쳐지는 길 아닌 길 내일모레 우리들은 어떻게 어느 언덕에 기대어 흘러내릴 것인가 레일이 내일로 모레로 모래 위에 아나크로니스틱anachronistic, 시대착오적 무방비상태로 무조건 뭘 하기로 하고 문 열어젖히게 될,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여기 只今에 지금 곧 맨발 딛고 금을 그어 금지선을 뛰어넘는 키 큰 올리브나무를 심어야 한다 웃자란 올리브나무 그늘이 우리를 아나르코 토포필리아anarcho topophilia, 울타리 없앤 아나키스트의 평야에 풀어줄 것이다 《미네르바》 2023 봄호, 신작소시집에서

시멘트 중독자/이영숙

시멘트 중독자 이영숙 사람들은 왜 자다가 깨어 냉장고 문을 연 채로 서서 물을 마시지? 팔꿈치 관절이 굳어가는 마네킹이나 꿈을 꾸다 제소리에 놀라 깨어난 봉제 인형처럼 가령, 날아가며 똥을 날리는 새들이나 추억을 되새기는 사람의 표정으로 건초를 되새김질하는 소 콘크리트죽을 섞으면서 달리는 레미콘은 스무드하게 현재를 수행한다 접시를 씻거나 마우스를 부리는 일로 회전근개파열 따위 욱신거려 돌아눕지 못할 때 후회 없는 생이란 없지 카페인이 아니라 후회 때문에 어두운 광장을 지나 낯익은 냉장고를 찾아가는데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무료한 되새김질을 반복하던 한낮의 레미콘 훅 끼치는 건초 냄새 잡식의 새똥 냄새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에 내걸리는 현수막이 과격한 것은 물기 다 빠져 금이 쩍쩍 간 외벽의 금단현상 때문이..

설계(設計)/강영은

설계(設計) 강영은 나는 내가 빈집일 때가 좋습니다 침묵이 괴물처럼 들어앉아 어두운 방을 보여줄 때 고독한 영혼이 시간과 만나 기둥이 되는 집, 증거 없는 희망이 슬픔 과 만나 서까래가 되는 집 우주의 법칙을 속삭이는 별빛과 그 별빛을 이해하는 창가와 그 창가에 찾아든 귀뚜라미처럼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에 들어있는 벌레라고 우는 집 희고 깨끗한 미농지를 바른 벽이 도면(圖面)에 있어 닥나무 껍질에 둘러싸인 물질의 영혼처럼 영혼의 물질처럼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어 충만한 집 내가 알고 있는 숲은 결코 그런 집을 지은 적 없어 새장 같은 집을 그릴 때마다 영혼을 설계하는 목수처럼 종달새가 날 아와 얼기설기 엮은 노래로 담장 쌓는 집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지탱하는 그 담장에 걸터앉아 떠오르..

수영장/심언주

수영장 심언주 티백처럼 나는 물에 잠긴다. 물고기가 되었다가 나룻배가 되었다가 물속에서 나는 알맞게 우러나는 것 같다. 물갈퀴가 많아서 멀리 갈 줄 알았는데 밀어내면 물은 더 많은 물을 데리고 와 나를 에워싼다. 달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어차피 오래 못 살 물거품을 치고 나갈 때마다 물의 살점들이 튀어 오른다. 밀어낸 사람도 가버린 기억도 떠나면서 내 살을 떼어 갔겠지. 직립을 포기한 채 나는 네가 파놓은 해자에서 발버둥 치는 중이다. 그런 나를 멀찍이서 네가 바라보고 있다. 내 허우적거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월간 《現代文學》 2023년 3월호

도시가스/이수명

도시가스 짐을 가지고 오지 마 짐을 항상 너무 많이 가지고 오잖아 짐을 둘 데도 없잖아 거리를 걸어가다 말고 같은 시간 같은 길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또 말다툼을 한다. 장소부터 말해봐 어느 국수집으로 가는 건지 아까 본 베트남 쌀국수는 사거리 번화가에 있고 베트남 쌀국수는 어디에도 있다. 다음 골목에도 베트남 쌀국수 계속 베트남 쌀국수 어느 집으로 갈 건지 베트남 쌀국수 집엔 사람이 많아 항상 많잖아 테이블이 몇 개 붙어 있는 좁은 집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잖아 너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데를 검색해보자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잔뜩 얹어주는 곳 우리는 설익은 나물을 씹으며 평소의 표정을 지을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가능하면 보편적인 표정을 보편적인 나물 앞에서 근..

판화/박수현

판화 박수현 인감 떼러 가서 알았다 엄지는 물론 나머지 손가락을 다 갖다 대도 주민센터 지문인식기는 나를 읽어내지 못했다 일종의 피부주름인 지문은 유사 이래 가장 신뢰받는 신분 확인 수단이라는데 나는 나를 증명하는 데 거듭 실패하고 있었다 돌기궁상문으로 분류된다는 그 주름을 나는 대체 언제 도난당했을까 세상은 차라리 주름의 촘촘하고 슬픈 서사라 할 터?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도 끝도 없는 주름 방정식의 이합집산에 따라 거시기 뭐시기로 분류된다는 유언(流言) 같은 비어(蜚語)도 있으니 말이다 ​ 산맥의 능선이나 계곡은 땅의 주름이며, 사막의 사구(沙丘)는 바람의 주름이며, 해안의 파도는 물의 주름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아코디언, 오르간 같은 악기가 주름의 처삼촌쯤 된다면, 미닫이 창문이나 계단 따위는 ..

서울남부구치소/정혜영

서울남부구치소 정혜영 ​ ​ 벚꽃이 피고 있다 벚꽃이 지고 있다 ​ 이펜하우스아파트 상공으로 대한항공 비행기가 천천히 날아간다 구치소 앞의 현수막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현수막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여자의 청바지며 해맑은 낯빛 ​ 457, 한 사람이 숫자로 호명되고 자신의 죄명조차 모르는 한 젊은이 면회시간을 기다리는 그의 발걸음은 초침과 분침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간다 그의 옷차림은 아직 겨울이고 ​ 구치소 상공으로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햇빛 속을 날아간다 시시각각 사라지는 푸른 하늘빛, 457의 손끝이 허우적거린다 ​ 구치소 상공을 지나가는 탑승객은 제 마음에 감옥 한 채 지닌 채 창밖을 내다보고 ​ 457과 비행기의 13A, 구치소 앞마당의 나, 세 사람이 하나의 풍경 안에 갇..

그 집/박수현

그 집 박수현 그 집은 사철 겨울이었네 영지못을 메운 터에 자리한 국민주택 13호, 담쟁이넝쿨이 온몸을 뒤채며 벽마다 기어올랐다네 삐걱, 철대문을 밀었을 때 사월에도 꽃망울 틔우지 못한 목련 한 그루가 아는 체를 했네 테너가수 N선생과 치매든 모친, 집안일 하는 아주머니, 영 철들지 않을 표정의 딸이 사는 집에 나는 길고양이처럼 잠행 했다네 갓 스물, 입주 과외하던 내가 그 애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집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내주곤 했다네 그 앤 자주 가출했고, 할머니가 종일 단물을 빨다 뱉은 쥬시후레쉬민트 은박지로 새를 접어 날렸다네 그 애가 접었던 종이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을까 저들끼리 모가지를 감고 조르며 오르는 담쟁이넝쿨들의 밀어(密語)였을까 달빛이 푸른 속눈썹을 늘이는 추운 밤이면 기..

공우림空友林의 노래˙19/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19 고독도 풍금(風琴)이랍니다. 어떤 고뇌도 맑아질 수 있도록 많은 건반을 갖고 있지요. 어느 날의 풍랑이 깨운 비애는 하늘까지 적신답니다. 딩 동 댕 동 저는 오늘도 풍금 앞에 앉아서 오로지 마음을 깎는답니다.(1990. 7. 25.) -_- “우리는 한 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 또 그 별은 보잘것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귀퉁이에 틀어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코스모스』, 2004, 사이언스북스, 46쪽) 기억 속의 저- 한 구절을 찾기 위해 몇 시간을 소비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한 셈이겠지요. 독서 노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 세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가 변신해버린 까닭에 그 과정까지를 더듬더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