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500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이수명

창가에 서 있는 사람 그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의 사람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아무 창가에 서 있고 창은 네모난 창 마주 보는 변의 길이가 같은 창 마주 보는 각들이 평온 한 창 거꾸로 세워도 똑같은 그러나 오늘은 전보다 조금 넓어진 듯 보이 고 안녕,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안녕, 대답하고 요즘 좋아 보여, 하면 요즘 좋아, 똑같이 말하고 거기서 뭐 해? 걷는 상상을 해 창밖으로는 차들이 지나가고 차들이 불을 켜고 환하게 지나가고 뛰어내리는 상상 그러나 창이 곧 사라져버리고 《도시가스》, 문학괴지성사, 2022

노을이라는 얼굴/송재학

노을이라는 얼굴 낯선 얼굴이 필요하다면 서쪽의 몽타주를 보라 몇 사람만이 노을이라 는 얼굴을 이해했다 언어를 뭉개버린 서쪽은 21세기를 이미 건넜다 서 쪽이 챙긴 화장 거울은 얼굴을 뼈의 윤곽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 경첩에 붙은 나비 장식은 부식되고서도 거울 속을 날아다닌다 서로가 서로를 괴로워하는 더듬이의 형용사끼리 엉키다가 부서졌다 구름은 장례식마 다 참석했다 육식과 잡식성이 서로 으드득 집어삼킨 서쪽이다 한 움큼 꽃을 꽂은 머리칼이 쏠린다 별일 아닌 듯 헐은 얼굴은 자꾸 색이 변하는 파스텔을 고른다 얼굴과 물고기가 같은 실크스크린으로 몇 번이고 프린 트된다 얼굴이라는 문장마다 외부는 내부의 가면이라는 능청스러운 이 정표가 붙어 있다 불곽이 있는 저 노을을 보라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문학동네,..

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김광호

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 김광호 딩동. 금단의 상자가 도착했습니다 후생에서도 판도라는 언박싱 중독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를 희대의 쌍년으로 만든 배후는 누구인가 희대의 쌍년이라는 유전을 세상에 퍼트린 자 난 좀 알아야겠어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아 언박싱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 매일 정체불명의 상자가 도착한다 작고 어두운 원룸에 들어 오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상자를 던져두었다 금단의 상자가 방의 밤만큼 쌓여 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자에 대한 생각을 지우는 일 또는 TV 틀어 놓기 또는 층간소음 유발하기 그 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약 먹고 잠들기 나의 일과가 잘 박싱된 방 이 방은 누구나에 의해 접어진 상자 같다 누군가에 의해 배달 되는 상자 같다(문을 열고 나가면 들어올 때와 다른 시공간이 나 ..

단순하지 않은 마음/강우근

단순하지 않은 마음 ​ 강우근 ​ ​ ​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비:행능력/최규리

비:행능력 최규리 구름의 모양에 시달려 달라지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해변을 걷는다 가장자리가 된다는 건 가장자리가 멀다는 것 연인들이 한 손을 잡고 한 손에는 불신을 들고 소확행을 타고 견디면 안 되는 것처럼 지나왔던 길은 그만하고 싶었던 길 신체는 하나씩 잘려 나갔지 감정 소모가 클수록 작아지는 몸 중심에서 벗어나면 싹둑싹둑 잘렸다 나를 소비하지 않겠어요 다짐했던 마음은 새우깡 한 조각처럼 쉽게 던져지고 빗나가면 죽을 것 같은 시절도 지났으니 이제 참지 말라고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가 살아졌다가 물벼락을 맞으며 물보라를 일으키네 날개를 접고 따뜻하게 데워진 에어프라이어에 엎드려 점점 익어가도 좋겠다 바다에서 바닥을 쓸어내리며 목격하지 않은 것처럼 목적을 향해 혹은 공복의 상태에서 공부의 상태는 ..

겨울의 미래/신용목

겨울의 미래 신용목 여름의 바다, 파도는 가끔 눈사람의 말을 한다 하얀 입술 하얀 몸, 어디에 내린 눈이 몸이 되고 어디에 내린 눈이 머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눈사람의 어디에 치는 파도가 몸이었고 어디에 치는 파도가 머리였는지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수평선은 고래를 키운다 아름답게 떨어지는 저녁 분수로 하늘 한쪽을 들어올린다, 부서진 것들의 마음으로서 파도와 눈보라 사라진 것들의 얼굴로서 물거품과 눈송이, 마음은 곧 각자의 길을 결정할 것이다 어느 문을 열고 나갈 것인지 눈과 입 뺨이나 손 혹은 언제나 밀물인, 몸 으로부터 눈사람의 익사체를 흘려보낼 것이다, 바다가 눈사람의 공동묘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바다에서 올라온 종족, 우리가 눈사람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석양이라는 눈사람들의 유적지, ..

0時에서 0時 사이/김길나

0時에서 0時 사이 ㅡ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김길나 들녘을 훑고 지나간 바람 끝에서 밀밭 몇 장이 구겨졌다 구겨진 밀밭이 서녘으로 넘어간 뒤에도 남은 밀밭에서는 밀알들이 자랐다 햇빛 쟁쟁한 한낮에 해 조각을 베어 물고 둘레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밀알들이 잘 익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생애는 사라졌다 땅을 떠난 밀알들이 줄을 서서 방앗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앗간에 내걸린 부서진 살 거울에 '너'는 보이지 않고 '나'는 없어졌다 이 거울로 집을 지은 빵집에서는 누구라도 밀가루 한 줌으로 사랑을 굽고 밀가루 한 줌으로 기쁨을 부풀린다 는 소문이 빵집 밖으로 새어나왔으나 세상의 밥상머리에서의 비만, 비만이 감춘 허기가 소동하는, 빵집 앞은 배고픔으로 붐볐다 애찬의 식탁에서 밀알들이 삼킨 해 조각들 둥글..

액땜/정숙자

액땜 정숙자 죽은 자는 울지 못한다 아니다 죽은 자는 울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 마당에서) 죽은 자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 좀 더 푸 른빛 내뿜어야 할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몇 곱은 더 실다운 삶을 울어야 할 피리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목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 도, 접목할 수도 분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언어는 석상의 눈물에 불과하지만 석상의 눈물은 드넓은 깃발 흔드는 팔과 그 깃대 아래 모인 발들의 쾌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뛸 수도 없는ㅡ죽은 자들 날 수도 없는ㅡ죽은 자들 길 수도 없는ㅡ죽은 자들 전철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병, 아무래도 저 병은 무 진장 신났나보다. 바다 하늘 들판이 꼭 바다 하늘 들판이어야 할 까닭이 뭐냐 마구 구른다. 킬킬킬킬킬 깨진 얼굴 비친다. 난생처음 ..

이별/최금녀

이별 최금녀 커피잔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아끼던 것 그는 깨지면서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벌겋게 충혈된 안개꽃무늬들 책상다리의 살점을 저며내고 내 손가락에서도 피가 흘렀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상의 낯선 기호가 되고 말았다 아끼던 것들은 깨지는 순간에 그처럼 얼굴을 바꾸는구나 순한 이별은 없다 시집 《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 (한국문연, 2022) 내 마음의 시, 《불교평론》 2022 가을

포옹/유자효

포옹 유자효 남극의 황제펭귄이 영하 수십 도의 폭풍설을 견디는 것은 포옹의 힘이다 그들은 겹겹이 에워싼다 수백 수천의 무리가 하나의 덩어릴 끌어안고 뭉친다 천천히 끊임없이 회전하며 골고루 포옹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그 중심은 열기로 더울 정도라고 한다 남극 황제펭귄의 포옹은 영하 수십 도를 영상 수십 도로 끌어올린다 시집 《포옹》 (황금알, 2022) 내 마음의 시, 《불교평론》 202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