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500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김재홍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돈도리는 된섬으로 북적거리는 돼지촌 돼지를 먹은 돼지와 돼지를 버린 돼지가 끼리끼리 위로하며 한길로 또각또각 울다가 웃다가 뛰고 달리며 사랑을 좇다가 삼십 년 동안 돼지는 죽지도 않고 꽥꽥거리며 꿀꿀거리며 소보다 싸고 소보다 작으며 소보다 빨리 자라고 된섬은 돼지들의 천국으로 꿀꿀거리는 돼지 소굴로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울고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죽고 수상작 김재홍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여우난골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한영수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 한영수 돌담에 떨어진 동백꽃은 살아있네 무서운 기색도 없이 등을 곧추 세우고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네 생활은 겨울이고 왜 동백나무는 서서 생활의 복판에 떨어진 꽃 하나 저녁의 둘레를 도네 소리도 향기도 섞지 않고 붉은 색은 눈에 가슴에 스며서 번지지만 꺼내기가 어렵네 무엇이 꽃이 되는지 지면서 여기서 순간은 어떻게 영원에 닿는지 눈보라 속의 통로를 여는지 큰 수술을 앞두고 현관을 나서기 전 미등을 끄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한 번 더 돌아보는 심정으로 자꾸 나는 더듬거리네 꽃을 버린 꽃을 어긋나면서 피는 꽃을 여기 꽃이 있다, 꽃보다 큰 꽃을 고립되면서 독립하는 꽃을 눈은 숨차게 쌓이고 눈 속은 붉은 꽃 소용돌이 나는 갇혔네 *체공녀 강주룡 ; 평양 ..

당신 영혼의 소실/황인찬

당신 영혼의 소실 ​ 황인찬 ​ ​ ​ 밥을 먹고 있는데 그런 메시지가 어디 떠오른 것 같다 스테이터스, 그렇게 외쳐도 무슨 창이 허공에 떠오른다거나 로그아웃이라고 말한다고 진정한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식탁 위에는 1인분의 양식이 있고 창밖으로는 신이 연산해낸 물리 법칙에 따라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너는 분갈이를 해야 한다며 거실에 앉아 식물의 뿌리와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구면인 신이 찾아와 내게 말을 건다 ―작군요 ―없는데요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나무들의 흔들림이 멈춘다) 회상이 끝나면 어느새 너는 없고 너무 커서 부담스러운 고무나무 한 그루가 거실 창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 나무에는 너의 영혼이 깃들었고 이것을 잘 가꾸면 언젠가 네가 열매 맺힐 것이..

우긴다고 되나/유안진

우긴다고 되나 반세기도 넘어 전에 임하댐에 잠긴 동화 속 나의 세상 그 작은 나라는 간데없고 처음 와보는 타국의 어디 같은 댐가의 낯선 마을 몇 집들 낯선 여기를 고향이라고 우긴다 낯선 골목의 낯선 이들이 ----------------------------------------------------------------------------------------------------------- 시작 노트 늙는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이기도 한가. 깨닫기는 하지만 실천할 체력이 없다는 슬픈 것인가. 아프기 전에는 아프다고 거짓말 많이 썼구나. 써온 모두가 거짓말뿐이었다는 부끄러움뿐이구나. 그때는 정말 진실이었는데, 늙고보니 아니었구나 싶어 부끄럽고 슬프다. 《유심》 2023 가을호

부팅/차재신

부팅 ㅡ 한영선 생물과 공학이 입체적으로 연동되는 프로세스를 전산화에 입 증하시오. 흰 종이에 DNA라 쓰고 읽으면 조작 가능한 모든 것들이 떠오 른다. 나는 언어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전기와 가늘게 이어진 회로들을 사랑한다. 회로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는 활자들, 활자 의 입자는 점과 선 사이 섬광으로 있는가. 나는 공학적으로 태어 났는가. 가능성을 탐닉할수록 나는 어디론가 연동되었다. 과학 선생을 사랑했던 것과 과학을 사랑하는 것 중 배후에 숨 은 것을 고르시오. 미래에는 과학을 외국어로 규정한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때 부터 초끈이니 상자 안의 고양이니 꿈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부 드럽게 뭉개지는 발음이 되었다. 입속으로 흘러내리는 웅얼거림 이 되었다. 학계에서는 언어를 완전히 없애버리자는 주장이 ..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이은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 이은 창고가 보이면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것이 창고에 대한 예의이니 까요 어제는 S푸드, 훈제된 고깃덩어리들을 포장했어요 그제는 올포유, 당 신을 위해 사정없이 옷을 갰어요 하마터면 옷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늘은 아이스크림 공장, 우주선이 희미한 빛을 내며 지나가요 떨어지 는 것들은 모두 속도가 됩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얼음이 쏟아져요 얼어붙은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요 손가락은 가만히 둔 채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요 빵과 빵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빵또아에 끼어 있는 손가락이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설렘의 구멍에 얼음을 가득 채워요 설렘과 설렘 사이 너무 많은 눈보 라, 꼿꼿이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설렘, 재빠르게 히말라야산맥의 눈을 퍼담아요 몸속에 가득한 눈보라..

내 아름다운 녹/장옥관

내 아름다운 녹 장옥관 녹을 온몸에 받아들이는 종을 보았다 암세포 서서히 번지는 제 몸 지켜보는 환자처럼 녹은 아름다웠다 움켜쥐면 바스락 흩어지는 버즘나무 가을은 저 홀로 깊이 물들었다 나는 지금 녹물 든 사람 링거 수액 스며드는 혈관 속 무수한 계절은 피어나고 거품처럼 파꽃이 피고 박새가 부리 비비는 산수유 가지에 노란 부스럼이 돋아나고 두꺼운 커튼 드리운 병실 바깥의 고궁 처마에 매달린 덩그렁 당그랑 쉰 목소리 파르라니 실핏줄 돋은 어스름 속으로 누가 애 터지게 누군갈 부르나니, 그 종소리, 《문학청춘》 2022년 봄호 2023년 제5회 이용악문학상 ------------------------- 장옥관 / 1987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너는 북벽에서 살았다..

우울증 환자/김상미

우울증 환자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의사가 준 알약을 먹고 자신만이 아는 길을 향해 떠난다. 그 길에 한 번도 들어서보지 못한 이들은 지옥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하는그 길을. ​ 가끔은 꿈속에서처럼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상심의 지렛대 위에 정다운 얼굴들을 올려놓고 그 끝에 앉아 아슬아슬 웃고 있는 듯한. ​ 그때마다 손 내밀어 같이 놀아주고 싶지만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입속으로 무수한 알약을 털어 넣으며 몸안에 있는 창이란 창은 모조리 잠그는 사람. 아무리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쳐도 따뜻하고 포근한 솜이불 대신 싸늘한 북풍을 여행 가방 가득 쑤셔넣고 심연에 그어놓은 무수한 골목길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서 먼 곳,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 ​ ​사람과 사람 사이로 아름답게 접히는 부분 아무리..

의자/조병화

의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읍니다. 시상(詩想)노트 이 시는 1960년대 쓰여진 ‘의자’(椅子)라는 시의 연작중의 하나입니다. 10편의 ‘의자’시를 썼습니다. 이 ‘의자’는 우리들이 늘상 쓰는 현실적인 의자, 실용하고 있는 의자가 아니라 시간의 의자, 역사의 의자, 존재의 의자를 말하는 겁니다. 이 시는 국정교과서 고3용 국어책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입니다. 이곳에 있..

강릉/박수현

강릉 ​ 박수현 ​ ​ 편지는 일년 만에 당도했다 작년 여름 바닷가에서 부친 편지였다 흰 봉투를 나이프로 뜯자 파도 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모래펄에 팬 낯선 발자국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내가 송부한 것은 눈부신 수평선과 수평선 끝에 눈썹처럼 걸린 흰 돛과 그보다 더 흰 팔월의 뭉게구름과 그 곁의 연필 밑그림 같은 낮달이었다 그런데 내가 평생 바다만 바라보는 해변의 낡은 우체통처럼 서서 받아 든 것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신새벽 꿈 같은, 해식애(海蝕崖) 너머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괭이갈매기 무수한 울음 너머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내 청춘의 휘파람 소리뿐이었다 파도에 닳아 조금씩 없어지는 모래펄의 낯선 발자국 같은 휘파람 소리뿐이었다 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이의 뒷모습이 어느 황폐한 별자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