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500

겨울바다/김남조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김남조(金南祚, 1927년 9월 26일 ~2023년 10월 10일 )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규슈 후쿠오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44년 귀국 후 경성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중퇴하고 1..

유리컵에 비 담기/이향란

유리컵에 비 담기 이향란 비울수록 더욱 빛이 나는 곳에 창이 기웃거리며 지나다니는 곳에 오늘은 비를 담는다 어제의 예보관 말대로 사방이 주룩거리므로 비가 어디서 시작됐든 어느 바람을 만나 키가 자랐든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했든 묻지 않기로 한다 스며들기 좋아하므로 구름이 투명하게 녹아내렸으므로 유리컵 안에 길게 길게 갇히는 비 입을 틀어막고 스스로 굳어가는 비 비가 사람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은 비로 흘러들어간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서로에게 젖는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은 비와 비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컵 속 비의 풍경이 한 방울 비의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비와 유리는 만나지 않으면서도 계속 깨지지 않는 관계로 맑게 부딪힌다 계간 《문학청춘》 2023년 가을호

잠복潛伏/안차애

잠복潛伏 안차애 숨소리를 듣는 것은 위험하다 숨소리 속에서 잠복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상처와 더러운 기억들을 두통약처럼 달고 사는 이들의 들숨과 한숨 사이에는 치명致命이 산다 영화 속의 남자 형사들은 위험한 여자들의 숨소리와 웃음소리를 훔치다가 겹겹 숨의 동그라미에 갇혔다 잘 웃고 강아지처럼 둥근 눈초리를 가진 용의자들의 숨소리는 특히 위험하다 마술사의 스카프와 흰 손 사이에서 새가 날고 장미가 피고 기침 소리가 나는 사탕이 튀어나오듯, 번진 숨소리에서 금 간 심장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깨진 물의 흐느낌 소리를 만질 수도 있다 상처로 상처를 태우는 숨은 불완전 연소라서 중독성 기체의 농도가 높은 것일까 더러운 기억 위에 쌓이는 더러운 기억은, 끈끈이주걱처럼 감염의 통로를 찐득찐득 열어 놓는..

아이스크림의 황제/황유원

아이스크림의 황제 ―제이크 레빈에게 황유원 나는 배스킨라빈스에 절대 가지 않지만 오늘 문자로 도착한 KT멤버십 생일쿠폰에 배스킨라빈스 4천원 할인권이 포함된 것을 보고 오랜만에 배스킨라빈스나 한번 가볼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처럼 작은 동네에도 있는 배스킨라빈스 너 반월 왔을 때 딱 한번 같이 가본 배스킨라빈스 차가운 아이스크림 먹고 기뻐하던 네 얼굴이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해 그 장면은 갓 퍼낸 아이스크림처럼 고물 냉장고 같은 내 머릿속에 녹지 않고 남아 있다 이상하다 너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도 아닌데 내게는 네가 꼭 아이스크림의 황제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때 그 과도할 만큼의 달콤함이 기억에 묻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억만으로도 벌레가 꼬일 만큼 우리 동네의 자랑인 사슴벌레들이 사방에서 ..

지슬/강영은

제13회 서귀포문학상 당선작, 2023 지슬* 강영은 나는 드디어 말 상대를 고안해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마다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붙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고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

절대지식/이은림

절대지식* 툭, 발치로 돌멩이 하나가 굴러왔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장면이다 돌멩이는 다분히 저돌적이다 내면에는 맹렬한 속도가 대기 중이다 나는 그런 돌멩이에게 선택당했다 돌멩이 하나를 쥐었을 뿐인데 든든해진다 차가운 온기가 몽글몽글 부푼다 돌멩이는 자라는 중일까 줄어들고 있는 중일까 돌멩이는 과묵하고 굳건하다 깊은 주머니를 장착한 옷만 고집하는 나의 패션 철학 1년 전의 지폐가 오늘, 뜻밖의 횡재가 된 것처럼 주머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1년 후의 주머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몸에서 너무 멀어 내 것임을 자주 잊는, 돌멩이를 꼭 쥐고 있는 왼손 정도는 만나겠지 혹은, 분노와 용기와 맹세를 사정없이 움켜쥔 무언가를 돌멩이에 갇힌 무늬는 돌멩이의 사연을 알고 있겠지 내 기분과 사연도 고스란히 들..

안전/정재리

안전 밧줄을 느슨하게 묶어 놓아야 배가 서로 부딪치지 않아요 정 선장은 매듭을 여러 번 감아 고정시키며 말한다 쉬는 날에도 바닥짐을 내려놓지 않는 배가 가만히 일렁거린다 견디는 무게가 좋은 운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숨을 잘 참는 아이와 웃음을 못 참는 아이들에게 물고기는 다 먹을 수 있다 가시와 뼈는 다르다 열 길 물속을 알고 들어간 햇빛이 꿈꾸듯 길을 잃고 물속 생물들 특유의 소란한 소리를 들어보았나요 어떤 소리는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산호가 분홍 알을 안개처럼 산란하는 장면을 귀로 듣는다 안개가 자욱할 때 예쁜 사진이 많이 나와요 오래된 연푸른 갑판 위에 서서 격자 수평을 맞추는 어깨 위 차고 넘치는 물결 뱃머리에 문성, 바탕체로 써놓고 성공으로 가는 문이라 풀이한다 조타실 문이 열려있다 《서정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