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499

한밤의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김종태

한밤의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김종태   카메라의 눈만 번득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밤의 우주선 속을 유영하듯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둥둥 떠돌 때함부로 찢긴 비닐봉지들이 휴지통 옆으로 빈둥거리네냉장고를 스칠 때 느껴지는 열기를 따라이곳의 어둠은 길고양이들의 천국이지동이 터오면 낯선 새가 모터 옆에서 알을 품겠지 닫는 시간도, 여는 시간도 없는 이 가게의 밤은크레파스 통의 뚜껑을 열어놓은 듯이이미테이션 낙원인 짝퉁 골목의 진열대 같네인적이 끊긴 쇼핑몰의 쇼윈도에 비친끝내 이길 수 없는 인형뽑기 기계의 불빛 같은 출입구에서우주복을 입은 풍선인형은 알 수 없는 춤을 추네 안 보이는 주인을 아이들 몇이 무서워하며바코드 찍은 후 체크카드를 투입구에 밀어 넣을 때닫힌 유리문으로 새들의 날개가 부딪는 소리가 들리네서둘수록 ..

검은 뱀/홍일표

검은 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그림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림자는 깨지지 않았다 비명도 통증도 없었다 그림자는 떨어지는 순간 마음을 지우고 몸을 닫았다 그림자는 부서지지 않아서 먹물처럼 흘러갔다 죽어서도 살아 꿈틀거렸다 그림자가 땅속으로 스미어 행방이 묘연해진 날 그림자를 놓친 세상이 두리번거리다 눈을 감는다 흘러넘쳐서 세상이 끌어안지 못한 그림자는 지워지고 깨끗하게 씻긴 바닥이 방긋 웃는다 어두컴컴한 땅속으로 이주한 그림자는 지하생활자가 된다 구근식물처럼 오래 눈감고 견디면서 조금씩 그림자를 벗는다 여기저기서 허물이 눈에 띄는 날 땅속에서 우글거리는 검은 뱀을 발견한다 운 좋게 흑장미로 몸을 바꾸는 그림자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세상 속으로 잠입한다 악몽에 놀라 소스라치며 잠을 깨..

흰 죽 외 1편/장석남

흰 죽 흰, 창호지 내음새 창호지 내음새가 나서 울음 둘레 같은 것도 있다 느리게 빈산이 걸어와 비치고 산의 뒤편으로 울긋불긋 꽃마을도 숨었다 마알간 숨 아래 외던 경經처럼 흰 죽 한 그릇 젓던 손은 시리고 싸락눈이 와서 흐린 발자국도 생기는 흰, 길 그림일기 나무를 그렸다 하늘을 밀쳐낸 큰 가지들과 큰 가지를 필사적으로 붙드는 작은 꽃봉오리 가지들을 그릴 때는 숨을 죽이고 바다를 그렸다 수평선을 긋고 수평선을 넘어오는 옛날의 돛단배를 그렸는데 배는 한 번도 아주 온 적은 없다 집을 또 그렸다 바다를 그린 다음 날 우리 집, 사람이 없으면 그건 우리 집 틀림없이 새를 그린다 허공에 붙박이는 새는 커다란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하늘을 그린 적은 없다 낮과 밤, 봄, 가을 하늘은 한 번도 제 본디를 보여주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 고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 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걸요 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 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 고 있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

이민 가방을 싸는 일/정영효

이민 가방을 싸는 일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만 샀습니다 하나에는 옷을 담고 하나에는 잡화를 담고 하나에는 아직 혼자 떠나는데도 분리를 잘해야 하고 분리를 잘할수록 정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을 줄이며 짐을 늘리며 가방 안에 맞는 구조를 만들어 보다가 그 나라에는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나는 우의를 챙겨 넣습니다 우의는 분명히 옷이지만 잡화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어느 쪽에 자리하든지 적당하다면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한데 이곳에서는 내가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나를 제일 모릅니다 먼 거리를 함께할 가방은 가로와 세로가 튼튼해 보입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기분으로 나는 생활을 이어 갈 구성을 찾습니다 짐을 푸는 순간 거주는 시작되니까 이곳과의 차이를 확인해 보면..

이승악*/강영은

이승악* 강영은 공동묘지 지나 닭 모가지 비트는 토종닭집 지나 벼슬 없는 닭처럼 이승에 든다. 삼나무, 팽나무, 새덕이, 죽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꽝꽝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굴거리나무, 사스레피나무, 개서어나무, 개섬벚나무, 윤노리나무, 터널을 이룬 숲속에서 이름 없는 산새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간다. 제주 산수국, 보라빛 꽃망울 들인 허파과리가 부푸는데 이승에서 이승을 맛보고 싶은 여러 겹의 육신들, 저승을 다녀온 것처럼 왁자지껄 다가온다. 이승에서 이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다가온다. 혼자 걸으니 무섭지 않나요? 탁탁거리는 스틱들, 배낭 없는 나를 무거워한다. 살쾡이 한 마리, 키 낮춰 숲길 건넌다. 마음을 할퀴고 가는 생각이 이승이라면, 세상 같은 건 가까이할 필요 없다고..

완연히 붉다/김명리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 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 활시위 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 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 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 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 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물가에 남아/박소란

물가에 남아 박소란 우물은 깊고 고요하다 먼 옛날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걸 죽음은 구멍 난 이파리처럼 가볍다 시간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야윈 돌배나무가 몇 개의 고단한 얼굴을 떨어뜨린다 아무런 마음도 품지 않은 돌배는 쓰지도 달지도 않을 것이다 돌배는 우물 속으로 홀린 듯 굴러 헤엄을 칠 것이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기도 할 것이다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고 혼자 걷던 누군가 우연히 우물을 발견한 뒤 손에 쥔 텀블러 가득 다디단 물을 길어 담는다 물 쪽으로 한껏 허리를 구부린 그의 뒷모습은 얼핏 위험한 곡예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안다 그가 무사히 물을 길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을 이끼 낀 나..

거울의 스푸마토/김경인

거울의 스푸마토* 김경인 델은 아름답다는 뜻 그러니까 멀리 있는 것 히-노-데 안-드-레-아-사-르-토 공기 방울을 닮은 이름을 징검다리 삼아 겹겹 어둠을 건너면 이 밤은 자투리 물감으로 덧칠한 거울 같아 비 온 다음 기름 웅덩이에서 처음 본 어여쁜 무지개처럼 나는 콜타르 기억 진득거리는 채로 캄캄하게 굳어버린 몇십 년째 상영 중인 엉망 진창, 담배 구멍 난 장판 얼굴을 거울에다 잔뜩 눌어 붙이고 다시 히 노 데 안 드 레 아 델 사 르 토 엉터리로 지껄여도 꽃 이파리처럼 겹겹 흩어져 달콤하게 녹아 사라지는 아름다운 이름 밤이 기울어 쏟아진다. 담배 연기처럼 자욱해진 내 위로 *안개와 같이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 —월간 《현..